Close

동탁[童濯], 동탁미오[董卓郿塢], 동탁분서[董卓焚書], 동탁연제[董卓燃臍]


동탁[董卓]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중영(仲潁)이고 감숙성(甘肅省) 출신이다. 처음에는 강족(羌族)의 추장을 회유하여 세력을 길렀다가, 189년 외척 하진(何進)이 환관을 토멸하고자 할 때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낙양(洛陽)으로 향하였으나 하진은 도리어 환관에게 죽고, 환관들은 원소(袁紹)의 군대에 몰살되었다. 그러나 동탁은 그대로 낙양에 입성하였다. 영제(靈帝) 때 전장군(前將軍)에 제수되었는데, 영제가 죽자 소제(少帝) 유변(劉辯)을 폐위시키고 헌제(獻帝) 유협(劉協)을 옹립한 뒤 전권을 휘두르자, 관동(關東)의 목(牧)·수(守)들이 연합하여 원소(袁紹)를 맹주로 추대하고 동탁 토벌군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각지의 명문거족까지 호응하자 동탁은 이 관동군(關東軍)의 위세에 눌려 낙양(洛陽)성을 소각하고 헌제를 끼고서 서쪽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다. 천도 후에도 횡포가 심하였고, 그 때문에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모략에 걸려 부장 여포(呂布)에게 살해되었다. 주살(誅殺)된 뒤에 그 시체가 저잣거리에 진열되었는데, 마침 날씨가 무더워 비대한 동탁의 몸에서 기름이 흘러내리자, 시체를 지키는 관리가 동탁의 배꼽에 심지를 박고 불을 붙여 밤을 밝히면서 며칠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동탁이 죽은 뒤 동탁의 부장 이각(李傕)이 헌제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였다. 장안은 부장들의 다툼으로 혼란이 거듭되었고 헌제는 장안을 탈출하여 조조(曹操)에게 의탁하였다. 조조 역시 순욱(荀彧)의 건의를 받아들여 헌제를 모시고 허현(許縣)으로 천도한 뒤 헌제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였는데, 이는 후일 조조가 북방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後漢書 卷102 董卓列傳> <史略 卷3 東漢>

동탁[童濯]  산에 나무가 아주 없음. 씻은 듯이 아주 깨끗함. 동올(童兀).

동탁겁제 천우장안[董卓劫帝 遷于長安]  동탁(董卓)은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의 장군으로 원소(袁紹)의 부름을 받고 도성으로 들어와 환관(宦官)들을 모두 도륙하고 헌제(獻帝)를 옹립한 다음, 황제를 겁박하여 제멋대로 낙양(洛陽)에서 장안(長安)으로 천도하고 낙양(洛陽)의 백성 수백만 명을 강제로 장안(長安)으로 이주시켰다.

동탁명종고[董卓鳴鐘鼓]  후한서(後漢書) 동탁전(董卓傳)에 “동탁이 상소하기를 ‘신이 징과 북을 울리며 낙양(洛陽)에 입성하려는 것은 중상시(中常侍) 장양(張讓) 등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직(社稷)에 행심(幸甚: 큰 다행)이요! 천하에 행심입니다![臣敢鳴鐘鼓入洛陽, 請除讓等, 社稷幸甚! 天下幸甚!]’라고 하였다.”고 한 데서 나온 말로, 간신(奸臣)을 제거하겠다는 명분으로 공공연히 군대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後漢書 卷72 董卓列傳>

동탁미오[董卓郿塢]  후한 헌제(後漢獻帝) 초평(初平) 3년(192)에 동탁(董卓)이 섬서성(陝西省) 미현(郿縣)에 오(塢)를 쌓고는 만세오(萬歲塢)라고 칭했는데, 이를 세상에서 보통 미오(董卓)라고 부른다. 동탁이 이곳에 각종 보물과 30년 동안 먹을 곡식을 비축해 놓고는 “일이 잘 되면 천하를 차지하고, 잘못되더라도 이곳을 지키면서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事成 雄據天下 不成 守此足以終老]”라고 하였는데, 동탁이 패망하면서 이곳도 허물어지고 말았다 한다. <後漢書 卷72 董卓列傳>

동탁분서[董卓焚書]  동탁(董卓)은 자(字)가 중영(仲穎)이며 농서(隴西) 서림(西臨) 조(洮) 사람이다. 후한서(後漢書) 동탁전(董卓傳)에 “천자(獻帝)가 서도(西都)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을 때, 탁(卓)은 스스로 낙양(洛陽)에 있는 필규원(畢圭苑)에 진을 치고, 종묘(宗廟)와 관부(官府) 및 주택을 모두 불태워버려 200리 안에는 더 이상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天子西都初長安, 卓自屯留畢圭苑中, 悉燒宮廟官府居家, 二百里內無復孑遺.]”라고 하였다. 풍속통의(風俗通儀)에 의하면, 이 때 다량의 서적이 버려지고 소실되었다고 한다.

동탁연복[董卓燃腹]  동탁의 배를 태움. 동탁(董卓)은 후한(後漢) 때의 사람으로, 영제(靈帝) 때 전장군(前將軍)에 제수되었는데, 영제가 죽자 소제(少帝)를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전권을 잡았다. 그 뒤 원소(袁紹) 등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고 스스로 태사(太師)가 되어 흉포한 정치를 하였다. 후한 헌제(後漢獻帝) 초평(初平) 3년(192)에 동탁이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여포(呂布) 등의 계책에 의해 주살(誅殺)된 뒤에 그 시체가 저잣거리에 진열되었는데, 마침 날씨가 무더워 비대한 동탁의 몸에서 기름이 흘러내리자, 시체를 지키는 관리가 동탁의 배꼽에 심지를 박고 불을 붙여 밤을 밝히면서 며칠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三國志 卷6 魏書 董卓傳> <後漢書 卷72 童卓列傳>

동탁연제[董卓燃臍]  동탁의 배꼽을 태움. 후한서(後漢書) 동탁전(董卓傳)에 “동탁의 시체를 저자거리에 드러내놓았는데, 날씨가 덥기 시작하였고, 동탁이 평소 살이 찌고 비대하여 기름이 땅에 흘렀으므로, 시신을 지키는 관리가 동탁의 배꼽에 불을 붙이니 밝은 빛이 새벽까지 갔으며, 며칠 동안을 탔다.[乃屍卓於市. 天時始熱, 卓素充肥, 脂流於地. 守屍吏然火置卓臍中, 光明達曙, 如是積日.]”라고 하였다.

동탁전명[董卓專命]  동탁(董卓)은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우림랑(羽林郞)으로 여러 번 전공(戰功)이 있었고, 영제(靈帝) 때는 병주목(幷州牧)으로 있었는데, 영제가 붕하자 하진(何進)의 부름에 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경사에 들어가 곧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어 소제(少帝)를 폐하고 하 태후(河太后)를 시해하고서 헌제(獻帝)를 세우는 등 모든 권병을 독천하였다. 전명(專命)은 임금의 명을 제 마음대로 부린다는 뜻이다. <後漢書 卷102>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