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탄부득[動彈不得] 꼼짝부득. 곤란한 처지에 놓여 꼼짝할 수가 없음. 곤란한 지경에 빠져서 꼼짝할 수가 없음을 이른다.
동태사[董太師] 동탁(董卓)을 가리킨다. 중국 후한(後漢)의 장군이자 동한(東漢) 말년의 역신(逆臣)이다. 낙양(洛陽)에 입성하여 소제(少帝)를 폐하고 하 태후(何太后)를 시해(弑害)하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정권을 잡았다. 장안(長安)으로 천도 후에도 몹시 음란하고, 횡포가 심하였으며, 뒤에 제위를 찬탈할 생각까지 품었다가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모략에 걸려 부장 여포(呂布)에게 척살 당하였다. 동탁이 여포(呂布)와 맹세하며 부자(父子) 관계를 맺고 매우 사랑하였으나, 결국에는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後漢書 卷72 董卓列傳> <三國志 卷7 魏書 呂布傳>
동태사[董太史] 동기창(董其昌)을 이른다. 명나라 말기의 문인학자이자 서화가(書畵家)이다. 자는 현재(玄宰), 호는 사백(思白)·향광(香光)·사옹(思翁)이며,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어려서부터 천재적 기풍이 있어 글씨에서 여러 대가를 초월하여 독보(獨步)의 경지를 개척하였고, 그림 또한 송·원의 여러 대가의 장점을 겸비하였다.
동태사[同泰寺] 양(梁)나라 최대의 황실 사찰로, 무제(武帝) 보통(普通) 2년(521)에 착공하여 대통(大通) 원년(527)에 완공되었다. 당시에 건강성(建康城)의 궁성(宮城)인 대성(臺城) 북쪽에 있었는데, 현재 강소성(江蘇省) 강녕(江寧)의 동북쪽에 해당한다. 무제는 여기를 자주 오고 가기 위하여 궁성 북쪽에 대통문(大通門)라는 문을 새로 만들기까지 하였다. 양나라가 망하고 진(陳)나라가 건국되자 동태사는 마침내 폐허가 되었다.
동태후[董太后] 동태후(董太后)는 후한(後漢) 영제(靈帝)의 어머니이다. 비록 황후였었던 적은 없지만, 효인황후(孝仁皇后) 또는 영락황후(永樂太后)로 알려지기도 한다. 후한 환제(桓帝)의 5촌 조카이다. 중평(中平) 6년(189)에 영제(靈帝)가 붕어하고 아들 유변(劉辯)이 즉위하자 유변의 생모인 황후(皇后) 하씨(何氏)가 태후(太后)가 되어 조정에 임하여 섭정하였고, 영제의 모친이자 유변의 조모인 동씨(董氏)는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었다. 당시 동씨의 조카 표기장군(驃騎將軍) 동중(董重)과 하씨의 오라비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이 권력을 다투었는데, 동씨(董氏)가 정사에 간여하려고 할 때마다 하씨(何氏)가 모두 저지하였다. 그러자 동씨(董氏)가 하씨(何氏)를 질책하며 욕하였는데, 이해 5월에 하진과 삼공(三公) 및 하진의 아우 거기장군(車騎將軍) 하묘(何苗) 등이 상주(上奏)하여 동태후를 하간국(河間國)으로 옮길 것을 청하고 하태후가 이를 승인하여 하진이 군대를 보내어 동중의 집을 포위하고 동중을 체포하여 직위를 해제하자 동중이 자살하였다. 그 뒤 6월에 동태후는 근심과 두려움 때문에 갑자기 붕어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며느리인 하태후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여겼다. 동태후(董太后)는 붕어한 뒤에 그의 관(棺: 시신)은 하간으로 보내져서 남편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장(劉萇)과 함께 신릉(愼陵)에 합장되었다. <後漢書董皇后紀>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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