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평[東平] 동래부(東萊府)의 속현(屬縣)이다.
동평[東平] 완적(阮籍)을 가리킨다. 완적은 동평상(東平相)으로 있었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에 “완적은 보병아문을 관리하는 사람이 술을 잘 빚고 가진 술이 삼백 곡이나 된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소에게 간청하여 보병교위가 되었는데 그런 그를 사람들이 완보병이라고 불렀다.[阮籍聞步兵廚營人善釀, 有貯酒三百斛, 乃求爲步兵校尉. 世稱阮步兵.]”라고 하였다.
동평[東平] 동평(東平)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여덟째 아들인 동평왕(東平王) 유창(劉蒼)의 봉호로, 명제(明帝)의 아우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경술(經術)을 좋아하고, 깊은 지혜로 경사(經史)에 박통하였고, 공경(公卿)들과 더불어 관면(冠冕)·거복(車服)의 제도를 의정(議定)하였다. 후한 명제(後漢明帝)가 일찍이 자기 아우인 동평헌왕에게 “일간에 동평왕은 집에 있으면서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라고 묻자, “선(善)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爲善最樂]”라고 대답했다 한다. <後漢書 卷42 光武十王列傳 東平憲王蒼>
동평관[東平館] 상경(上京)한 왜인이나 유구인(琉球人)들이 머무르던 숙소를 가리킨다. 태종 9년(1409) 2월 민무구(閔無咎)와 민무질(閔無疾)의 서울에 있는 집을 헐어서 그 재목과 기와로 동평관(東平館)과 서평관(西平館)을 지었다. 동평관을 동평관 1소, 서평관을 동평관 2소라 부르기도 하였다. 세종 4년(1422)에 일본국왕사 규주(圭籌) 일행 135명이 상경하였을 때 동·서평관 이외에 묵사(墨寺)라는 절을 객사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세종 16년(1434)에 관의 남쪽에 두 채를 더 지었으며, 세종 27년(1445)에는 묵사를 해체하여 왜관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그 규모는 자세하지 않으나 대략 50여 명 정도가 한 번에 머무를 수 있는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인들의 동평관 체재 기간은 짐의 양이 30바리 이하는 10일 이내, 40바리 이상은 20일 이내, 80바리 이상은 30일 이내로 하였다. 동평관의 직제는 감호관(監護官)을 책임자로 하고, 현임(現任) 산관(散官)을 3품 이하 6품 이상으로 하며, 감호관 3인에 녹사(錄事) 2인을 두되, 감호관 3인 중 1명은 의금부(義禁府) 관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동평관은 5품 관아로 하였다. 당초 동평관은 단순히 상경왜인들의 숙소였으나, 점차 숙소의 기능을 초월하여 왜인 행정 일반에 이르는 업무도 담당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 서울시 중구 인현동 2가 192번지 일대로 충무로 4가 파출소 북쪽에서 덕수중학교 앞에 이르는 중간 지점으로 추정된다.
동평관[東平館] 일본의 사자(使者)가 서울에 오면 묵게 하고 접대하는 관사(館舍)이다. 한성부 남부(南部) 낙선방(樂善坊)에 있었으며, 뒤에 이 근처를 왜관동(倭館洞)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에 없어졌으므로 확실한 위치는 모르나 지금의 인현동(仁賢洞)과 충무로(忠武路) 5가 사이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평관[東平館] 조선 시대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남산 북쪽 기슭의 남부 낙선방(樂善坊 지금의 인사동)에 있었으며 1407년(태종7)에 설치되었다. 1438년에는 영접도감(迎接都監)의 예에 따라 감호관(監護官)을 두었고, 이어 동·서평관을 동평관 1·2개소로 개칭하고 5품아문(五品衙門)으로 정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 폐지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이곳을 왜관동(倭館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동평관[東平館] 조선(朝鮮) 개국(開國) 초기에 설치한 곳으로, 낙선방(樂善坊)에 있었는데, 일본(日本) 등 여러 외국(外國) 사신(使臣)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조선조 초기부터 일본과 왕래가 있어서 그들의 머무를 곳을 마련한 것인데, 뒤에 여기에 있던 일인들이 질서를 문란케 한 일이 있으므로 여기에 감호관(監護官)을 두었으며, 주위에 울타리를 둘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