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풍두우[東風杜宇] 촉(蜀)나라의 망제(望帝) 두우(杜宇)가 신하에게 선양(禪讓)하고 물러나 서산(西山)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죽었는데 그 혼백이 두견새로 화하여 특히 동풍이 부는 봄철이면 밤낮으로 피눈물이 흐르도록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후로 두우는 두견새를 뜻하게 되었다. <華陽國志 卷3 蜀志> 단종이 재위 3년 만에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선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사육신(死六臣)이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주륙되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寧越)로 유배되었다. 단종이 자신의 신세를 두견새에 비유하여 읊은 칠언율시(七言律詩) 자규사(子規詞)가 있다. <箕雅集>
동풍무력백화잔[東風無力百花殘] 이상은(李商隱)의 시 무제(無題)에 “서로 만나기 어렵더니 이별 또한 어렵고, 동풍이 힘이 없으니 온갖 꽃 시드네.[相見時難別亦難, 東風無力百花殘.]”라고 한 데서 보인다.
동풍백오[東風百五] 동풍 백 오 일. 한식(寒食)이라는 말. 동지(冬至)서부터 1백 5일이면 한식이 되기 때문이다.
동풍범숭광[東風泛崇光] 소식(蘇軾)의 시 해당(海棠)에 “동풍이 살살 불어와 꽃의 높은 광채 띄우니, 향 안개는 아득하고 달빛은 낭하로 옮겨가네.[東風嫋嫋泛崇光 香霧空濛月轉廊]”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동풍불여주랑편[東風不與周郞便] 두목(杜牧)의 시 적벽(赤壁)에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혔지만 쇠는 녹지 않아, 혼자 그것을 갈고 씻어 전조(前朝)의 유물인 줄 알았네. 동풍이 주랑(周郞)의 편을 들지 않았더라면, 봄 깊은 동작대(銅雀臺)에 이교(二喬)가 갇혔으리라.[折戟沈沙鐵未銷, 自將(磨洗認前朝. 東風不與周郞便, 銅雀春深鎖二喬.]”라고 한 데서 보이는 구절이다. 주랑(周郞)은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장수였던 주유(周瑜)를 이르고, 이 구절은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을 그린 것이다. 한(漢)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13년(208), 조조(曹操)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南下)하여 오(吳)나라를 공격하였다. 위(魏)의 조조(曹操)가 손권(孫權)의 장수 주유(周瑜)와 적벽(赤壁)에서 대전을 벌였을 때, 조조는 북쪽 언덕에 진(陣)을 쳤고 주유는 남쪽 언덕에 진을 쳤다. 그런데 북방의 사병(士兵)들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질 않아서 이에 굵은 쇠사슬로 전선(戰船)을 모두 연결하여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다. 이때 주유의 막하장(幕下將) 황개(黃蓋)가 자신의 배에 기름에 적신 마른 장작[薪]을 싣고서 장막으로 그 위를 덮고는 거짓으로 조조에게 항복하여 자신의 배가 조조의 배에 가까이 닿게 되자 오나라 병사들이 불을 질렀는데, 때마침 동남풍(東南風)이 불어와 불이 더 세차게 타올랐다. 이에 한 덩어리가 되어 있던 조조의 전 해군은 이 일격에 불에 모두 타버렸고, 조조의 백만 대군은 이 싸움에서 태반이 불에 타 죽거나 오·촉 연합군에게 쫓겨 목숨을 잃었고 조조가 크게 패하여 달아났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9 吳書 周瑜傳>
동풍비송원[東風悲送遠] 동풍도 멀리 보내길 슬퍼함. 두보(杜甫)의 시 송장손구시어부무위판관(送長孫九侍御赴武威判官)에 “하늘도 멀리 보내길 슬퍼하는지, 비가 하얗게 아득히 쏟아지네.[皇天悲送遠, 雲雨白浩浩.]”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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