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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한[同閈], 동한거록도위[東漢鉅鹿都尉], 동한경엄[東漢耿弇], 동한당고[東漢黨錮]


동한[東漢]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 십국(十國)의 하나로 유민(劉旻895~954)이 세운 북한(北漢)의 이칭이다. 오대(五代)의 후한(後漢)이 후주(後周)에게 멸망되자, 그 일족 유숭(劉崇: 일명 민旻)이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세운 나라이다. 4대 29년 만에 송(宋) 나라에 멸망하였다.

동한[東漢]  후한(後漢)의 별칭. 한 광무제(漢光武帝) 유수(劉秀)가 동경(東京), 즉 낙양(洛陽)에 도읍한 때문에 이렇게 일컬어진 것이다. 전한(前漢)을 서한(西漢)이라 하는 데 대한 대칭(對稱)이다.

동한[同閈]  한 마을. 같은 동네.

동한거록도위[東漢鉅鹿都尉]  거록도위는 거록 지방의 도위 벼슬을 말하는데 후한 광무제의 할아버지이다. 처음에 능호를 창릉으로 하였다가 뒤에 장릉으로 고친 것이다.

동한경엄[東漢耿弇]  A.D. 29년, 광무제(光武帝)가 경엄(耿弇)으로 하여금 제남(濟南)의 장보(張步)를 토벌하게 하였다. 장보(張步)는 그의 아우 장남(張藍)에게 정예병 2만을 거느려 서안(西安)을 지키게 하고 1만여 명으로 임치(臨淄)를 지키게 하였는데, 서안(西安)과 임치(臨淄) 두 성(城)의 거리는 40리가량 떨어져 있었다. 경엄(耿弇)은 공성기구를 정비하게 하고 진군하여 서안(西安)과 임치(臨淄)의 한가운데를 갈라서 두 성(城) 사이에 포진한 뒤, 여러 장교들에게 5일 후에 서안성(西安城)을 공격한다는 명령을 선포하니, 장남(張藍)은 이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경계와 수비를 엄중히 하였다. 경엄(耿弇)은 출격하기로 한 전날 한밤중에 제장(諸將)에게 명령을 내려 새벽 일찍 밥을 지어 먹고 동틀 녘에 임치성(臨淄城)에 이르도록 하였다. 경엄(耿弇)은 “서안(西安)에서는 우리가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수비를 강화하였으나 임치(臨淄)는 방심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하루 만에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임치성(臨淄城)이 함락되면 서안성(西安城)은 고립되고 장남(張藍)과 장보(張步)는 연락이 끊겨 반드시 도망갈 것이니, 이른바 하나를 쳐서 둘을 얻는다는 것이다. 만약 먼저 서안(西安)을 공격하면 쉽사리 함락되지 않아서 반드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것이며,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장남(張藍)이 군대를 이끌고 임치(臨淄)로 달아나 합세하여 우리의 허실을 깊이 관망하면 우리는 적지에 깊이 들어와 군량을 수송할 길이 없어서 10여 일 사이에 싸우지도 않고 곤궁하게 될 것이다.”라 하고, 임치성(臨淄城)을 공격하여 반나절 만에 함락하니, 장남(張藍)이 이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마침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였다. <後漢書 권19 耿弇列傳>

동한기[東漢記]  동한기(東漢記)는 자치통감(資治通鑒)의 한기(漢紀)를 가리키는 말이다. 동한기라고 한 것은 후한(後漢)을 동한(東漢)으로 호칭했기 때문이다.

동한당고[東漢黨錮]  동한(東漢 후한後漢) 당고(黨錮)의 화. 후한(後漢) 당쟁(黨爭)의 화로 후한 말기 환제(換帝) 때 환관이 정권을 전담하자, 조사(朝士)인 진번(陳蕃)·이응(李膺) 등이 이들을 제거하려고 당을 이루어 버티다가, 진번(陳蕃)과 이응(李膺) 등 1백여 명이 오히려 환관들에 의해 당인(黨人)이라 지목되어 종신토록 벼슬하지 못하는 처벌을 받았음.

동한당고[東漢黨錮]  동한(東漢) 말년에 궁중황제의 측근에서는 내시들이 큰 세력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여 마음대로 하려고 선비들을 당인(黨人)이라 하여 모두 죽이고 가두어 금고(禁錮)하였다. 그것을 당고(黨錮)라 한다. 그 결과가 한 나라의 망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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