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한십이주[東韓十二州] 동한의 열두 고을. 순전(舜典)에, 순(舜) 임금이 “12주를 처음으로 만들었다.[肇十有二州]”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국토를 의미한다. <書經 虞書 舜典>
동한유씨[東漢劉氏]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왕망(王莽)의 찬탈(簒奪)로 망한 한(漢)을 그가 중흥시켰다.
동한이두[東漢李杜] 동한(東漢)의 이·두(李杜). 후한(後漢) 때 명망이 높았던 이고(李固)와 두교(杜喬)를 아울러 말한다. 자세한 사적은 후한서(後漢書) 권63 이두열전(李杜列傳)에 보인다.
동한이래 불법시입중국[東漢以來 佛法始入中國] 동한 때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옴.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에 인도(印度)의 불교(佛敎)가 중국(中國)에 전입(傳入)되었다고 한다.
동한절의[東漢節義] 동한(東漢)의 절의(節義)는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엄릉(嚴陵)과 같은 고사(高士)를 초치하여 절의를 숭상한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희(朱熹)는 “동한이 절의를 숭상할 때에 이미 청담(淸談)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 대개 당시 절의를 지킨 사람들은 온 세상을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니 저절로 천하를 우습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잠깐 사이에 청담으로 흘러들게 되는 것이다.”라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朱子語類 卷34 論語16 子謂顔淵曰章>
동한절의설[東漢節義說]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기절(氣節)을 숭상하여 온 조정이 풍조(風潮)를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태학생(太學生)과 사인(士人)은 청의(淸議)를 조성하여 외척(外戚)·환관(宦官)과 격렬한 충동을 일으켰으니 대표적 인물로는 이응(李膺)·범방(范滂) 등이다. 이들은 선비들의 기풍이 절조와 의리를 숭상하여 맑은 이름을 주장하고 탁한 조정을 비방하는 것을 일삼았다가 간악한 환관(宦官)들에게 모함을 당하여 동한당고(東漢黨錮)의 화(禍)가 일어났다.
동한지여강[東漢之呂强] 여강(呂强)은 자(字)가 한성(漢盛)이고 성고(成皐) 사람인 바, 환관(宦官)으로 소황문(小黃門)이 되고 영제(靈帝) 때에 준례에 따라 후(侯)에 봉해지게 되었으나 이를 굳이 사양하였으며,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나자 군주의 측근에 있는 탐관오리들을 제거하고 금고(禁錮)에 처한 당인(黨人)들을 모두 사면할 것을 청하였다. 뒤에 동료 환관의 모함을 받고 잡혀오게 되자, 자살하였다.
동한후리[東漢候吏] 동한(東漢)의 후리(候吏). 후한(後漢)의 순리(循吏) 왕패(王霸)를 말한다. 왕패가 뒤에 광무제(光武帝)가 된 유수(劉秀)를 따라 전투를 벌이다가 적군의 추격을 받아 궁지에 몰린 일이 있다. 이때 앞에 가로놓인 호타하(滹沱河)를 먼저 정탐해 보니 물은 불고 배는 한 척도 없어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이 동요할까 걱정하여 돌아와서 보고할 때에는 얼음이 꽁꽁 얼어 건너갈 수 있노라고 하였다. 이에 큰 동요 없이 군사를 행진시킬 수 있었는데, 군대가 호타하에 도착해 보니 정말로 그사이에 얼어붙어 있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른바 ‘왕패빙합(王霸氷合)’의 고사이다. <後漢書 卷20 王霸列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