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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겸공[東海謙恭], 동해고사[東海高士], 동해고한[東海枯旱], 동해과부[東海寡婦]


동해[東海]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선진(先秦) 때는 현재의 황해(黃海)를 가리켰고, 진한(秦漢) 이후에는 황해를 포함한 동쪽 바다 전체를 가리켰다.

동해[東海]  이름은 월(越), 자는 원초(元超). 고밀왕(高密王) 태(泰)의 아우이다.

동해[東海]  천시원에 속한 별자리인 우원장의 11성 가운데 여덟 번째 별이다.

동해겸공[東海謙恭]  동해는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장자(長子)로 동해왕(東海王)에 봉해진 유강(劉疆)을 가리킨다. 유강은 곽 황후(郭皇后)의 소생으로 일찍이 황태자(皇太子)가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성품이 본디 겸공한 데다 뒤에 모후(母后)인 곽후(郭后)가 폐위(廢位)되기에 이르자 더욱 몸 둘 바를 모르다가 끝내는 태자의 자리를 고사하였다. 그리고 번국(蕃國)에 봉해지기를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동해왕에 봉해졌는데 그가 특히 겸공하고 예(禮)를 잘 지켰기 때문에 천자의 애틋한 사랑을 입었다. <後漢書 卷42 光武十王列傳 東海恭王彊傳>

동해고사[東海高士]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인 노중련(魯仲連)을 가리킨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동해고한[東海枯旱]  중국의 한(漢)나라 때 동해 효부(東海孝婦) 고사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동해(東海)에 사는 수절 과부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어머니는 자기 때문에 며느리가 개가하지 못한다고 여겨 스스로 목을 매 죽었는데, 이에 시누이는 며느리가 핍박하여 시어머니를 죽게 했다고 고소하였다. 이때 우공(于公)이 옥리(獄吏)로 있으면서 힘껏 변호했으나 며느리는 변명할 길이 없어 죄를 시인하고 죽게 되었다. 그후 동해 지방이 3년 동안 가물었고, 나중에 동해 태수(東海太守)가 새로 부임하자, 우공이 그 사실을 말하여 그 며느리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주게 하니, 곧 비가 내렸다고 한다. 후에 우공의 아들 우정국(于定國)이 승상에 올랐는데, 바로 우공이 옥리로 있으면서 쌓은 음덕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史略 卷2 西漢>

동해공양[東海公陽]  음귀인(陰貴人)의 아들로 광무제(光武帝)의 넷째 아들이다.

동해공왕[東海恭王]  동해공왕(東海恭王) 유강(劉彊)은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장자(長子)로 곽황후(郭皇后)의 소생이다. 곽황후가 폐위되고 귀인(貴人)인 음씨(陰氏)가 황후가 되자 황태자로 있던 유강은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니, 동해왕(東海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류양( 劉陽)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동해과부[東海寡婦]  한(漢)나라 때 동해군(東海郡)의 효부(孝婦)가 아들도 없이 일찍 과부가 된 채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던 중, 그 시어머니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시누이의 고발에 따라 관청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고 자복(自服)한 끝에 사형을 받고 말았는데, 그 뒤에 3년 동안 동해군 전역에 큰 가뭄이 들었다는 고사가 있다. <漢書 卷71 于定國傳>

동해노련비[東海魯連悲]  강포(强暴)한 적에게 짓밟히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국사(國士)의 처절한 마음을 말한다. 전국 시대 제 나라 노중련(魯仲連)이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蹈東海而死] 포악한 진(秦) 나라가 천하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것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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