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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산금[東海散金], 동해살효부[東海殺孝婦], 동해삼년한[東海三年旱], 동해삼산[東海三山]


동해도[東海道]  옛날 일본의 8도(道)의 하나로서 기내(畿內)의 동쪽, 동산도(東山道)의 남쪽 주로 바다에 닿아 있는 지방을 말한다.

동해묘[東海廟]  강원도 강릉시 정동에 있으며, 동해의 용왕을 모신 사당이다. 창건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동해비[東海碑]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가리킨다. 일찍이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이 비에 글씨를 썼다.

동해산금[東海散金]  동해에서 재산을 남들과 나누어 씀. 소광(疏廣)은 전한(前漢) 때 동해(東海) 난릉(蘭陵) 사람이다. 선제(宣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어 태자가 조정에 참내할 때마다 함께 천자를 알현했다. 그때 태부(太傅)인 소광은 태자의 앞에 서고 소부(少傅) 조카 소수(疏受)는 그 뒤를 따라 숙부와 조카가 나란히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이것을 보고 조정 사람들은 큰 영광이라며 축하하였다. 후에 소광이 소수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기로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며, 공을 세우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하였다. 지금 이천석(二千石)을 지내고 있는 동안에 환관(宦官)들이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이러한데도 물러나질 않았으니 후회할 것이 있을까 걱정이다. 부자가 함께 벼슬을 그만두고 조정을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하늘이 준 수명을 다해 사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吾聞 ‘知足不辱, 知止不殆. 功遂身退, 天之道也.’ 今仕官至二千石, 宦成名立, 如此不去, 懼有後悔, 豈如父子相隨出關, 歸老故鄉, 以壽命終, 不亦善乎?]”라고 하였다. 이에 소광과 소수가 치사(致仕)하자 선제는 황금 50근을, 태자는 20근을 내렸다. 소광(疏廣)은 조카 소수(疏受)와 향리로 돌아와서 날마다 집안 식구들로 하여금 황금을 팔아 음식을 장만하여 집안사람과 옛 친구와 빈객들을 초청해서 서로 즐겼다. 혹자가 자손을 위하여 재산을 장만하라고 권하였다. 이에 소광이 “내 어찌 늙고 혼미하여 자손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다만 옛날의 전지(田地)와 집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만일 자손이 이 가운데에 부지런히 힘쓴다면 충분히 옷과 음식을 마련하여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할 것이다. 이제 다시 재산을 더 보태주어서 쓰고도 남게 한다면 다만 자손들에게 나태함을 가르칠 뿐이다. 어질면서 재물이 많으면 뜻을 해치고, 어리석으면서 재물이 많으면 허물을 더한다. 또 부자는 사람들이 원망하는 대상이다. 내 이미 자손들을 제대로 교화시키지 못하였으니, 그 허물을 더하고 원망을 만들어내고자 하지 않는다. 또 이 황금은 성주(聖主)께서 늙은 신하를 은혜롭게 길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향당(鄕黨) 사람과 종족들과 함께 임금께서 하사하신 것을 함께 누려 나의 여생을 다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吾豈老誖, 不念子孫哉. 顧自有舊田廬. 令子孫勤力其中, 足以共衣食, 與凡人齊. 今復增益之. 以爲贏餘. 但敎子孫怠惰耳. 賢而多財則損其志, 愚而多財則益其過. 且夫富者, 衆之怨也. 吾旣無以敎化子孫. 不欲益其過而生怨. 又此金者, 聖主所以惠養老臣也. 故樂與鄕黨宗族, 共饗其賜, 以盡吾餘日. 不亦可乎.]”라고 하였다. <漢書 卷71 疏廣傳>

동해살효부[東海殺孝婦]  중국의 한(漢)나라 때 동해효부(東海孝婦) 고사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동해(東海)에 사는 주청(周靑)이라는 수절 과부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어머니는 자기 때문에 며느리가 개가하지 못한다고 여겨 스스로 목을 매 죽었는데, 이에 시누이는 며느리가 핍박하여 시어머니를 죽게 했다고 고소하였다. 이때 우공(于公)이 옥리(獄吏)로 있으면서 힘껏 변호했으나 며느리는 변명할 길이 없어 죄를 시인하고 죽게 되었다. 그 후 동해 지방이 3년 동안 가물었고, 나중에 동해 태수(東海太守)가 새로 부임하자, 우공이 그 사실을 말하여 그 며느리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주게 하니, 곧 비가 내렸다고 한다. 후에 우공의 아들 우정국(于定國)이 승상에 올랐는데, 바로 우공이 옥리로 있으면서 쌓은 음덕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史略 卷2 西漢>

동해삼년한[東海三年旱]  한(漢)나라 때 동해군(東海郡)에 어떤 효부(孝婦)가 있었는데, 자식도 없이 일찍 남편을 여의었으나 시어머니를 아주 잘 봉양하였고, 시어머니가 그를 재가시키려고 하였지만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자기 때문에 며느리가 재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목을 매어 자살하였는데, 그곳 태수(太守)가 고의로 시어머니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 청상과부를 처형하려 하였다. 이에 우공이 이 효부는 반드시 시어머니를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태수가 끝내 효부를 처형하였다. 그러자 동해 지역에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다. <漢書 卷71 于定國傳>

동해삼산[東海三山]  동해 있는 삼산(三山)은 발해(渤海)에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을 말한다. 발해에는 본디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의 다섯 선산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바다에 떠서 조수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므로 상제(上帝)가 열여섯 마리의 자라로 하여금 머리를 들어 떠받치고 있게 하여 이 산들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용백국(龍伯國)의 거인이 낚시질을 하여 여섯 마리의 자라를 잡아가자, 대여와 원교 두 산이 북극으로 흘러가서 큰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동해삼세[東海三世]  동해(東海)는 선경(仙境)인 봉래도(蓬萊島)가 있다는 동쪽 바다를 가리키고, 삼세는 선녀(仙女)인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이르기를 “동해가 세 번 상전(桑田)으로 변한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동해삼위상전[東海三爲桑田]  신선전(神仙傳)에 의하면, 선녀(仙女)인 마고(麻姑)가 일찍이 왕방평(王方平: 왕원王遠)에게 이르기를 “만나 뵌 이래로 벌써 동해가 세 차례 상전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접때 봉래산에 이르러 보매 물이 또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대략 절반쯤 얕아졌으니, 어찌 장차 다시 육지로 변하지 않겠는가.[接侍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于往者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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