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원부[東海怨婦] 중국 한(漢) 나라 때 동해군(東海郡)에 어떤 효부(孝婦)가 있었는데, 자식도 없이 일찍 남편을 여의었으나 시어머니를 아주 잘 봉양하였고, 시어머니가 그를 재가시키려고 하였지만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자기 때문에 며느리가 재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목을 매어 자살하였는데, 그곳 태수(太守)가 고의로 시어머니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 여자를 처형하였다. 그러자 동해 지역이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는데, 후임 태수가 부임하여 즉시 그 효부의 누명을 벗겨 주고, 소를 잡아 효부의 묘에 제사를 지내자 곧바로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說苑 貴德>
동해원부[東海怨婦] 한나라 때 동해에 주청(周靑)이라는 효부(孝婦)가 있었는데, 그녀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고생만 시키는 것을 걱정하여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이에 시누이가 주청이 시어머니를 목매달아 죽였다고 모함하였고, 관부에서는 곧 주청을 체포하였다. 가혹한 형벌 때문에 주청은 자신이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는데, 형이 집행되기 전 주청은 만약 자신이 정말로 죄가 있다면 목의 피가 아래로 흐를 것이고, 죄가 없다면 목의 피가 거꾸로 솟구쳐 흐를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형이 집행된 후, 과연 목의 피는 거꾸로 흘러 사형장 깃대 끝으로 솟구쳤다. 주청이 죽은 후, 그 지방에는 삼 년 동안이나 큰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搜神記>
동해원부[東海冤婦] 한(漢)나라 때 동해군(東海郡)의 효부(孝婦)가 자식도 없이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개가를 권해도 거절하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그 뒤 시어머니가 노쇠하여 누를 끼치고 싶지 않은 생각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는데, 시누이의 무고로 관아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고는 거짓 자백을 하여 사형을 받았다. 그 뒤 3년 동안 동해군 전역에 큰 가뭄이 들자, 후임 태수가 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는 소를 잡아서 효부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비(碑)를 세우니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漢書 卷71 于定國傳>
동해위상전[東海爲桑田] 선녀인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이르기를 “만나 뵌 이래로 벌써 동해가 세 차례 상전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접때 봉래산에 이르러 보매, 물이 또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대략 절반쯤 얕아졌으니, 어찌 장차 다시 육지로 변하지 않겠는가.[接侍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于往者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동해가 상전으로 변했다는 것은 오랜 세월의 변천을 의미한다.
동해유용부[東海有勇婦] 악부(樂府) 무곡가사(舞曲歌辭) 가운데 하나이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작품이 있다.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술을 연마하고, 당당하게 쳐들어가 원수의 목을 베어 내고, 이를 국문(國門)의 위에다가 걸어놓아 그 원수의 악을 만천하에 알리고 자신의 거사가 공명정대함을 보여 준 어느 용감한 여인의 이야기로, 이 소재는 이백(李白)에 의해 악부시(樂府詩) 동해유용부(東海有勇婦)로 창작되었다. 그 시에 “동쪽 변방에 용감한 부인이 있었으니, 蘇武라 해도 무엇이 부끄러울까? 검술을 배운 越나라 여인은, 초연하기가 밤하늘의 유성처럼 빛났네.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몸을 버려서까지, 만 번 죽을지언정 생명을 돌보지 않았네. 서슬이 시퍼런 비수는 흰 눈처럼 빛났고, 푸른 하늘도 정성에 감복하였네.[東海有勇婦, 何慚蘇子卿. 學劍越處子, 超然若流星. 損軀報夫仇, 萬死不顧生. 白刃耀素雪, 蒼天感精誠.]”라고 하였다.
동해은거[東海隱居] 동해에서 은거한 강태공(姜太公)을 이른다.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태공(太公)이 주왕(紂王)을 피하여 동해의 바닷가에 살다가 문왕(文王)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흥기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에게 귀의하지 않겠는가? 내가 듣건대 서백(西伯)은 노인을 잘 봉양한다고 하였다.’고 하였다.[太公避紂, 居東海之濱, 聞文王作, 興曰 ‘盍歸乎來? 吾聞西伯善養老者’.]”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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