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향[冬享] 겨울철 종묘 제사.
동향[東鄕] 옛날에는 높은 분을 동향하여 앉혔다.
동향[桐鄕]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에 있는 지명인데, 선조(先祖)가 벼슬하였던 고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나라 때 주읍(朱邑)이 어려서 동향의 색부(嗇夫)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 존경하였다. 그 뒤에 주읍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옛날에 동향의 관리가 되었을 때 그 백성들이 나를 사랑하였다. 그러니 반드시 나를 동향에다가 장사 지내라.”고 하였다. 주읍이 죽자 그 아들이 동향에다가 장사 지냈는데, 동향의 백성들이 과연 사당을 세워서 세시로 제사를 지냈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동향[桐鄕] 지명(地名). 지금의 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 북쪽에 있었다. 본래 춘추 시대의 동국(桐國)이었다. 전하여 지방 수령이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사후에도 사모하는 정이 남아 있는 향리를 이르는바, 서한(西漢) 선제(宣帝) 때의 명신인 주읍(朱邑)이 젊었을 때 동향(桐鄕)의 사법과 조세를 담당한 벼슬인 색부(嗇夫)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여 가혹하지 않고 사람을 때리거나 욕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늙은이와 고아·과부를 찾아보고 위로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그 뒤 대사농(大司農)에 이르러 병으로 죽을 무렵 아들에게 자신을 동향에 장례 지낼 것을 부탁하며 “내가 전에 동향(桐鄕)의 아전으로 있었으므로 동향 백성들이 나를 사랑하니, 반드시 나를 동향에 장사 지내라. 후세 자손이 동향 백성보다 못할 것이다.[我故爲桐鄉吏, 其民愛我, 必葬我桐鄉. 後世子孫奉嘗我, 不如桐鄉民.]”라고 하였다. 주읍이 죽자 황제가 안타깝게 여겨 조서(詔書)를 내려 칭양하기를 “대사농 주읍은 청렴결백하여 절의를 지키고 조정에서 물러나와 밥을 먹으며 경계 밖의 사람과 사귀거나 폐백을 바치는 일이 없었으니 훌륭한 군자라고 말할 만하다. 흉한 재앙을 만났으니 짐이 매우 불쌍히 여기노라. 주급의 아들에게 황금 백근을 내려 그 제사를 모시게 하라.[大司農邑, 廉潔守節, 退食自公, 亡疆外之交, 束脩之餽, 可謂淑人君子. 遭離凶災, 朕甚閔之. 其賜邑子黃金百斤, 以奉其祭祀.]”라고 하고는 주읍의 아들에게 황금 백 근을 하사하여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주읍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언대로 동향 서쪽 성곽 밖에 장사 지냈는데, 백성들이 과연 무덤을 모으고 사당을 세워 명절에 끊임없이 제사를 지내주었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동향구애[桐鄕舊愛] 동향(桐鄕)에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음. 동향(桐鄕)은 중국의 지명으로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의 북쪽에 있다. 한(漢) 나라 때 대사농(大司農) 주읍(朱邑)이 젊었을 적에 동향의 색부(嗇夫)로서 일을 청렴하고 공평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에게 매우 존경을 받았는데, 죽은 뒤에 이곳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에 그곳 백성들이 그의 묘 옆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세시(歲時)에 향사를 올렸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문선(文選)에 실린 반안인(潘安仁 반악潘岳)의 하양현작시(河陽縣作詩)에 “제나라 도읍에는 남은 가락이 없는데, 동향에는 남아있는 민요가 있네.[齊都無遺聲, 桐鄕有餘謠.]”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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