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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현[董賢], 동현[董賢], 동현문동취[東縣聞銅臭], 동현재[董玄宰], 동현주의[東賢奏議]


동현[董賢]  한 애제(漢哀帝) 때의 미소년으로 애제의 총신이다. 자는 성경(聖卿)으로, 운양(雲陽) 사람이다. 동공(董恭)의 아들로, 성제(成帝) 때 태자사인(太子舍人)이 되었다. 애제가 즉위한 후 낭관(郎官)이 되었고, 외모로 애제의 총애를 받아 황문랑(黃門郞), 부마도위시중(駙馬都尉侍中)이 되었다. 애제와 늘 함께 있으면서 같은 침상을 썼으며, 애제가 그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그의 몸에 눌린 소매를 잘라내기까지 한 적이 있어 단수(斷袖)라는 말이 생겨났다. 벼슬이 대사마(大司馬)·위장군(衛將軍)에 이르렀으나, 애제가 죽은 후 왕망(王莽)의 농간으로 대사마의 인수(印綬)가 몰수되자 두려움을 느끼고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이후 일가가 몰락하였으며, 왕망이 그가 죽은 척했다고 의심하여 관이 파헤쳐지고 검험(檢驗)이 끝난 뒤에는 시신이 감옥 안에 묻혔다.

동현[董賢]  동현(董賢)은 자가 성경(聖卿)으로 풍익(馮翊) 운양(雲陽) 사람이다. 한 애제(漢哀帝) 유흔(劉欣)의 총신(寵臣)이다. 처음에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있다가 수화(綏和) 2년(기원전 7)에 애제(哀帝)가 즉위하자 낭관(郞官)이 되었다. 애제가 그의 아름다운 용모를 매우 좋아하여 황문랑(黃門郞)으로 승진시켰다. 이로부터 동현에 대한 애제의 총애는 날로 커져서 부마도위(駙馬都尉) 시중(侍中)으로 삼아 출입할 때 수레에 동승시키고 항상 가까이서 자신을 시봉(侍奉)하도록 하였다. 한 달 사이에 얻은 상사(賞賜)가 1억 전(錢)에 달하기도 하였다. 동현은 성정이 유화하고 애제의 의중에 영합하기를 잘하여 아첨으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애제는 동현의 누이를 후궁으로 맞이하여 소의(昭儀)로 삼고 동현을 고안후(高安侯)로 삼아 식읍 1천 호를 봉하였으며 얼마 후에 다시 2천 호에 봉하였다. 심지어 동현을 대사마(大司馬)에 임명하여 삼공(三公)의 반열에 두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에 불과했다. 원수(元壽) 2년(기원전 1)에 애제가 죽자 얼마 안 되어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자결하였다. <漢書 卷93 董賢傳>

동현문동취[東縣聞銅臭]  촉 땅 사람들이 철전(鐵錢)을 사용하다가 무산을 지나면 동전(銅錢)을 쓰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이에 연유하여 무산의 강 위에 있는 두 돌이 동전퇴(銅錢堆)와 철전퇴(鐵錢堆)로 명명되었다 한다.

동현재[董玄宰]  명(明)나라 만력(萬曆) 연간의 유명한 서화가인 동기창(董其昌)으로, 현재(玄宰)는 그의 자이고, 호는 사백(思白)이며, 다른 호는 향광거사(香光居士)이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명나라 말의 서화가로 글씨는 물론 그림에도 뛰어났다. 중국의 회화를 북종화(北宗畵)와 남종화(南宗畵)로 나누고 이를 분석한 이론이 유명하다. 서예에서는 안진경(顔眞卿)과 우세남(虞世南)의 글씨를 배워 당대의 대가가 되었으며, 그림에서는 전문 화가가 그린 북종화(北宗畫)보다 문인 사대부들의 그림인 남종화(南宗畫)를 더 정통의 화법으로 주장하여 이후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저술로 화지(畫旨), 화안(畫眼), 화선실수필(畫禪室隨筆) 등이 있다.

동현주의[東賢奏議]  숙종조(肅宗朝)에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가 편찬한 책으로,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 등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된 9분의 선현들이 국왕의 지덕(知德)을 깨우치기 위해 올린 상소문과 진덕문(進德文) 등을 모아 24권 8책으로 만들었다. 제현(諸賢)의 글에는 편자의 평(評)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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