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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골[杜骨], 두공[竇巩], 두공[竇鞏], 두공[枓栱], 두공[斗栱], 두공[竇公], 두공부[杜工部]


두골[杜骨]  두보(杜甫)의 골(骨)이란 뜻으로, 고향을 떠나 있는 신세를 뜻한다. 두보의 투간함화양현제자(投簡咸華兩縣諸子) 시에 “장안의 호된 추위 누가 홀로 슬퍼하나, 두릉 땅의 노인네 골 쪼개지려 하는구나.[長安苦寒誰獨悲 杜陵野老骨欲折]”라고 하였다.

두공[竇巩]  당나라 때 시인으로 자는 우봉(友封)이고 경조(京兆) 금성(金城) 사람이다. 시로 이름을 얻은 두상(竇庠)의 동생이다. 원화(元和) 연간에 진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 모르는 게 없다고 할 정도였으며, 성격이 호방하고 고금에 대한 담론을 즐겨 그의 집 앞에 부잣집 수레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말을 우물거리는 것 같은 그를 백거이(白居易)는 섭유옹(囁嚅翁)이라고 불렀다. 원진(元稹)이 벼슬하는 곳에서 부사(副使)를 지내기도 했다. 악저(鄂渚)에서 세상을 떴다. 두씨연주집(竇氏聯珠集)에 그의 시가 전한다.

두공[竇鞏]  두공(竇鞏)은 당나라 때의 인물로, 시에 능하였다.

두공[枓栱]  건물의 기둥과 도리와 들보가 연결되는 부분을 결구하는 장치이다.

두공[斗栱]  기둥 위에 받쳐 들보, 마룻대를 괴는 방형(方形)의 목재(木材)를 말한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 전래하는 전통 목조건축의 용어로, 대들보나 도리에 가해지는 무게를 모아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도록 끼워 넣은 일종의 구조물이다. 공포(栱包)라고도 한다.

두공[竇公]  두공(竇公)은 후한(後漢)의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을 이른다. 자는 백도(伯度)이다. 후한 장제(章帝)의 황후 두 태후(竇太后)의 오라버니로, 장제가 죽은 뒤에 두 태후가 정치를 하게 되자 시중(侍中)으로 권세를 잡았다. 흉노를 크게 격파한 다음에 돌에다 공적을 새겨 기념하면서, 문사(文士)인 반고(班固)로 하여금 연연산명(燕然山銘)을 짓게 했다는 유명한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23 竇憲列傳>

두공[竇公]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의 소경 악관(樂官)으로서 한 문제(漢文帝) 때 대사악장(大司樂章)을 바쳤다고 한다. 당시의 나이가 180세였다고도 하고, 280세까지 살았다고도 한다. 한서(漢書) 권30 예문지(藝文志)의 안사고(顏師古) 주(注)에 실려 있고, 태평어람(太平御覽), 자사정화(子史精華), 패문운부(佩文韻府)>등에 장수한 인물로 실려 전한다.

두공부[杜工部]  당대(唐代)의 대시인 두보(杜甫)를 이른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다. 당 숙종(唐肅宗) 때인 48세 즈음에 관직을 버리고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 정착했을 때,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의 시(詩)는 웅혼(雄渾)·침통(沈痛)·충후(忠厚)하여, 이백(李白)과 함께 당대 시인의 쌍벽(雙壁)을 이뤘다. 그는 시에 담긴 사상(思想)을 중시하였고 시경(詩經) 초사(楚辭) 이래의 현실주의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시가 국가와 인민에게 유익한 것이어야 함을 주장하여, 이러한 바탕에서 진자앙(陳子昂)과 원결(元結)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시에는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격정(激情)이 담겨 있어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조선 시대에 중국 시인의 시집으로는 유일하게 번역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로 간행되어 널리 읽혀졌다.

두공부[杜工部]  성당(盛唐) 시기에 이백(李白)과 함께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찍이 검교 공부 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의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또는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도 하는데, 두심언(杜審言)의 손자이다. 그는 이전의 낭만주의적 시풍 위에 우국충정으로 당대의 현실을 잘 반영한 한편 개성적이고 창의적으로 표현한 결과 이전보다 새로운 차원의 시풍을 이룩하여, 후세에 그를 시성(詩聖)이라 부르고 그의 시를 시사(詩史)라 불렀다. 또한 고도의 형식미를 갖춘 율시(律詩)를 잘 지었다. 두보가 기주(夔州)의 운안(雲安)에 머물 때 벗 잠삼(岑參)에게 보낸 시에 “가을밤에 배를 댄 뒤 봄풀이 돋았는데 푸른 단풍 아래 몸져누워 서울 대궐 못 간다네.[泊船秋夜經春草 伏枕靑楓限玉除]”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4 寄岑嘉州>

두공부집[杜工部集]  당(唐) 나라 두보(杜甫)의 시문집(詩文集)이다. 공부(工部)는 관명인데. 두보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냈으므로 두공부(杜工部)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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