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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덕기[杜德機], 두도지란[杜弢之亂], 두도처[竇滔妻], 두동미서[頭東尾西], 두동치활[頭童齒闊]


두덕기[杜德機]  마음을 안으로 수렴하여 부동(不動)의 경지를 견지하는 것. 생기(生機)를 완전히 잃어서 죽음을 연상케 하는 모습. 덕(德)의 움직임, 즉 생명력이 막혀 있는 상태. 생동(生動)하는 기틀을 막는다는 뜻으로, 죽음을 뜻한다.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정(鄭)나라 신무(神巫) 계함(季咸)이 열자(列子)의 스승인 호자(壺子)의 관상을 보고는 축축하게 젖은 재[濕灰]의 형상을 보았다면서 “그대 스승은 이제 죽었다.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子之先生死矣 弗活矣]”라고 하자, 열자가 눈물을 흘리며 호자에게 그 말을 전하니, 호자가 “아까는 내가 그에게 대지(大地)의 형상을 보여 주었다. 멍한 상태로 움직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았으니, 그는 아마도 나의 생기가 막힌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鄕吾示之以地文 萌乎不震不正 是殆見吾杜德機也]”라고 대답한 이야기에서 보인다.

두도[杜度]  후한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度)이다. 두도(杜度)는 성(姓)이 두(杜)이고 명(名)이 도(度)인데, 동한(東漢) 때 제국(齊國)의 승상이었다. 두(杜)와 도(度)가 중국 음으로는 동음(同音)이다. 초서에 능하였고 그 법을 최원(崔瑗)·최실(崔實) 부자가 이어받았다.

두도[杜度]  누르하치 집권 당시에 패륵(貝勒)을 지낸 인물이다. 패륵(貝勒) 저영(褚英)의 아들로, 천총 원년에 조선에 출정, 조선과 맹약을 체결한 다음 돌아왔다. 또 숭덕 원년에 조선에 출정하여 다이곤(多爾袞)과 함께 강화도를 빼앗았고 조선의 수군을 패배시키기도 하였다.

두도지란[杜弢之亂]  진(晉)나라 회제(懷帝) 영가(永嘉) 5년(311)에 파(巴), 촉(蜀)의 유민(流民)들이 형주(荆州)와 상주(湘州)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원래부터 거주하던 백성들에게 고통을 당하였다. 상주자사(湘州刺史) 구조(苟眺)가 유민들을 다 죽이고자 하니, 유민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4, 5만 가호가 일시에 모두 배반하고 예릉령(醴陵令) 두도(杜弢)를 추대하여 상주자사(湘州刺史)로 삼았다. 두도의 세력이 강성하여 왕돈(王敦)이 두도를 토벌하기 위해 도간(陶侃) 등을 보내어 수십 번을 싸웠으나 난을 진압하지 못하였고 진(晉)나라 민제(愍帝) 건흥(建興) 3년(315)에 와서 주방(周訪)이 평정하였다.

두도처[竇滔妻]  전진(前秦) 때 두도(竇滔)가 진주자사(秦州刺史)가 되어 멀리 유사(流沙)로 가게 되었다. 이에 그의 아내 소씨(蘇氏)가 그리운 마음을 담아, 전후좌우 어디로 읽어도 문장이 되는 회문선도시(回文旋圖詩)를 지어 비단에 수놓아 보냈다고 한다. <晉書 卷96 竇滔妻蘇氏傳>

두독걸가무염[杜篤乞假無厭]  두독(杜篤)이 끊임없이 청탁함. 후한서(後漢書) 문원전(文苑傳)에 “두독(杜篤)은 자(字)가 계아(季雅)이고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박학하였지만 사소한 예절 따위는 지키지 않아 고향 사람들에게 예우받지 못했다. 미양(美陽)에 있으면서 현령과 교유하였는데, 두독(杜篤)이 자주 청탁을 하자 함께 어울려주지를 않으니 현령을 원망하였다. 현령도 괘씸하게 여겨 두독(杜篤)을 잡아들여서 서울로 보냈다.”라고 하였다.

두동고[竇東皐]  동고(東皐)는 두광내(竇光鼐)의 호이다. 자는 원조(元調)이고 산동(山東) 제성(諸城) 사람이다. 1742년 진사가 되고, 좌도 어사, 상서방 총사부를 역임했다. 학정(學政)을 감독했는데, 그가 기용한 사람들 가운데 공경(公卿)에 오른 자들이 매우 많았다. 저서로는 성오재시문집(省吾齋詩文集)이 있다.

두동미서[頭東尾西]  제사(祭祀)의 제물(祭物)을 진설(陳設)할 때, 생선(生鮮)의 머리는 동쪽을 향(向)하고 꼬리는 서쪽을 향(向)하게 놓는 것을 이른다.

두동치활[頭童齒闊]  머리가 벗어지고, 이가 빠져 사이가 벌어진다는 뜻으로, 늙은이의 얼굴 모양(模樣), 노쇠(老衰)했음을 형용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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