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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기재[杜老奇才], 두로성야[杜老成野], 두로음시수[杜老吟詩瘦], 두로행장[杜老行藏], 두로혁전[豆盧革傳]


두로기재[杜老奇才]  두로(杜老)는 두보(杜甫)를 가리킨 것으로,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진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탁월한 시적 재능을 말한다.

두로사군의[杜老思君意]  두로(杜老)는 두보(杜甫)를 가리킨 말이다. 두보는 평소에 애군 우국(愛君憂國)의 충정(衷情)이 남달라, 그의 시에 웅혼하고 침통하고 충후한 뜻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두로서경시[杜老徐卿詩]  서경시(徐卿詩)는 두보(杜甫)가 일찍이 서경(徐卿)의 두 아들을 칭찬하여 지은 서경이자가(徐卿二子歌)를 말한 것이다. 서경이자가의 대략에 “그대는 못 보았나 서경의 두 아들 뛰어나게 잘난 것을, 길한 꿈에 감응하여 연이어 태어났다네. 공자와 석가가 친히 안아다 주었다니, 두 아이는 모두가 천상의 기린아일세.[君不見徐卿二子生絶奇, 感應吉夢相追隨. 孔子釋氏親抱送, 竝是天上麒麟兒.]”라고 하였다.

두로성야[杜老成野]  두로(杜老)는 두보(杜甫)를 가리키는데, 노(老) 자는 존칭이다. 야(野)를 이루었다는 것은 곧 두보가 항상 두릉야로(杜陵野老), 두릉야객(杜陵野客) 등으로 자칭했던 데서 온 말이다.

두로음시수[杜老吟詩瘦]  이백(李白)이 두보(杜甫)를 두고 한 말이다. 이백이 장난으로 지어 두보에게 준[戱贈杜甫] 시에 “묻노니 그대는 작별한 뒤로 왜 그리 수척한가. 이는 모두 그 동안 시를 읊느라 그런 것이네.[借問別來太瘦生 總爲從前作詩苦]”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三十 詩文拾遺>

두로추잠태임빈[杜老抽簪太恁頻]  벼슬을 그만두는 일을 자꾸만 반복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누상(樓上)이라는 오언 율시(五言律詩) 첫머리에 “천지간에 부질없이 머리만 긁적이며, 백옥의 비녀를 자꾸만 뽑는구려.[天地空搔首, 頻抽白玉簪.]”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2>

두로행장[杜老行藏]  행(行)은 세상에 나와 도를 행하는 것이며, 장(藏)은 초야에 은둔하는 것으로 출처(出處)와 같은 말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쓰이면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은둔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두로는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그의 시 자양서형비차이거동둔모옥(自瀼西荊扉且移居東屯茅屋)에 “양수의 동쪽과 양수의 서쪽에서, 한결같이 시냇가에 머물다 보니, 오거나 가거나 모두가 띳집인데, 머무름은 농사를 짓기 위함일세.[東屯復瀼西 一種住淸溪 來往皆茅屋 淹留爲稻畦]”라고 하였다.

두로혁전[豆盧革傳]  두로혁(豆盧革)은 관적(貫籍)과 자호(字號)가 자세하지 않다. 두로혁의 열전(列傳)은 구오대사(舊五代史) 권67 당서(唐書) 第43 열전19와 신오대사(新五代史) 권28 당신전(唐臣傳) 제16에 실려 있다. 두로혁은 당(唐)나라 때의 귀족으로 당말(唐末)의 혼란기에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度使) 왕처직(王處直)의 밑에 있다가 후당(後唐)에서 벼슬하여 위열(韋悅)과 함께 재상을 지낸 사람이다. 두로혁과 위열은 학문은 없이 당나라 때의 명족(名族)이었다는 사실만 내세워 행세(行世)하였다. 오대(五代)의 정치 지형에서 추밀사(樞密使)는 군국대사(軍國大事)를 결정하는 최고의 요직인데, 두로혁과 위열 등이 모두 당시 위세가 등등하였던 추밀사 곽숭도(郭崇韜)에게 빌붙어서는 곽숭도의 부친 이름이 홍(弘)이라고 하여 홍문관(弘文館)을 숭문관(崇文館)으로 고치자고 상주(上奏)할 정도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처럼 곽숭도가 정사를 그르칠 때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구신(具臣)일 뿐이었다. 그런데 뒤에 곽숭도가 죽자 뒤늦게 그를 모질게 탄핵하는 행태를 보여 식자(識者)들의 비난을 샀다. 나아가 이들은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일어났는데도 자책(自責)하거나 황제에게 간언(諫言)을 올리기는커녕 아첨만을 일삼았다. 심지어 장생술(長生術)을 구하거나 아들들을 편법으로 관직에 임명하거나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기까지 하는 등 소인배의 정상(情狀)을 밑바닥까지 보여주었다. 이러한 비리에 더해 귀족 출신임을 내세워 무인(武人)들과 조정의 동료들을 얕잡아보는 태도로 인해 두 사람은 결국 소희보(蕭希甫)에게 탄핵을 받아 926년에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고계흥(高季興)의 일로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이처럼 두 사람은 실력보다 문지(門地)만 가지고 한 세상을 살다 간 소인배의 전형(典型)이라고 하겠는데, 구오대사의 사평(史評)에서는 “두로혁과 위열은 명족(名族)의 후예로 태어나 새로 건립한 국가를 보좌하여 공업이 비록 천하를 재도(裁度)하여 이루는 재상의 역할로는 부족했지만 죄악이 명백하고 현저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도리어 권신(權臣)에게 시기를 받아 다만 폄적되었다가 사사되는 명(命)을 도망갈 길이 없었으니 공정한 마음으로 말해본다면 또한 동정할 만하다.[革說承舊族之冑 佐新造之邦 業雖謝于財成 罪未聞于昭著 而乃爲權臣之所忌 顧後命以無逃 静而言之 亦可憫也]”라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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