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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릉[杜陵], 두릉[斗陵], 두릉계졸[杜陵計拙], 두릉기객[杜陵飢客], 두릉남수[杜陵枏樹]


두릉[杜陵]  두릉(杜陵)은 당(唐)나라의 문인인 두보(杜甫) 일족이 세거(世居)하던 곳으로 곧 두보를 가리킨다. 그의 조상이 두릉에 살았고 자신도 두릉 부근에 살았기에 두릉야로(杜陵野老), 두릉포의(杜陵布衣), 두릉야객(杜陵野客) 등으로 자호하였다.

두릉[杜陵]  장안(長安) 동남쪽 20리 되는 곳에 있던 지명(地名)이다.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동남쪽에 있다. 명승지여서 예로부터 유락지로 유명하였다. 고대에는 두백국(杜伯國)이었고, 진(秦)나라 때 두현(杜縣)이 되었다. 한나라 선제(宣帝)의 능묘가 동쪽에 있어 두릉(杜陵)으로 이름 붙여졌다. 명승지여서 예로부터 유락지로 유명하였다. 두씨(杜氏)가 세거(世居)한 곳으로, 두릉(杜陵)에 거하며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키기도 한다. 노조린(盧照鄰)의 시 장안고의(長安古意)에 “활 메고 매 날리니 두릉의 북쪽이요, 협객들 돌 골라 복수하니 위교 서쪽이로다.[挾彈飛鷹杜陵北 探丸借客渭橋西]”라고 하였다.

두릉[斗陵]  두릉(斗陵)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마재를 이르는바, 마현(麻峴) 또는 마현(馬峴)으로도 표기한다.

두릉[杜陵]  두릉은 경북 상주의 지명이다.

두릉계졸[杜陵計拙]  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생계가 곤궁하여 늘 타향을 떠돌아다녔다.

두릉기객[杜陵飢客]  객지의 처량한 신세를 뜻한다. 두릉(杜陵)은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원래 지명(地名)이었는데, 두보의 조부(祖父) 때부터 이곳에 살았으므로 두보가 자신을 지칭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杜甫)의 시 봉증위좌승장이십이운(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에서 “나귀 타고 십삼 년을 돌아다니며, 장안에서 밥 얻어 먹으며 보낸 봄이 몇 번인가. 아침에는 부잣집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는 먼지 낀 살찐 말을 따라갔네. 남들이 먹다 남긴 밥과 술을 먹으며, 이르는 곳마다 남모르게 슬프고 고달팠네.[騎驢三十載, 旅食京華春. 朝扣富兒門, 暮隨肥馬塵. 殘盃與冷炙, 到處潛悲辛.]”라고 하였다.

두릉기객안장한[杜陵飢客眼長寒]  두릉(杜陵)은 두보(杜甫)를 가리키고, 두보(杜甫)가 일찍이 곡강(曲江) 가에서 봄놀이하는 미인들을 보고 여인행(麗人行)을 지었는바, 그 여인행에 “삼월이라 삼짇날에 천기가 화창하니, 장안의 물가에는 미인들도 많아라. …… 머리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니, 비취 깃으로 조화 만들어 귀밑머리 끝에 드리웠고, 등 뒤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하면, 구슬이 허리 자락에 주렁주렁 몸매와 잘 어울리네.[三月三日天氣新 長安水邊多麗人 …… 頭上何所有 翠爲匌葉垂鬢脣 背後何所見 珠壓腰衱穩稱身]”라고 했는데, 뒤에 소식(蘇軾)이 두보의 여인행을 이어서 지은 속여인행(續麗人行)에 “두릉의 주린 나그네는 눈도 길이 썰렁한 채, 절름발 나귀 해진 모자로 황금 안장 따라다니다, 꽃가지 너머 물가의 미인을 한 번 보았지만, 허리 다리만 등 뒤에서 보았을 뿐이었네.[杜陵飢客眼長寒 蹇驢破帽隨金鞍 隔花臨水時一見 只許腰肢背後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두릉남수[杜陵枏樹]  두보(杜甫)가 살던 성도(成都) 초당(草堂) 앞의 고목이 비바람에 뽑히자, 이것을 탄식하여 지은 <남목위풍우소발탄(枏木爲風雨所拔歎)>에 “초당 앞 강가에 녹나무 서 있는데, 이곳 노인들이 이백 년 묵었다 하네. 띠 풀 베고 거처를 정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인데, 오월에도 가을 매미소리 듣는 것 같았네.[倚江枏樹草堂前, 故老相傳二百年. 誅茅卜居總爲此, 五月髣髴聞寒聲.]”라고 한 데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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