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릉추흥팔수[杜陵秋興八首] 두릉(杜陵)은 두릉야로(杜陵野老)의 준말로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호이다. 추흥팔수(秋興八首)는 그가 대력(大曆; 당대종唐代宗의 연호) 원년에 기주(玘州: 사천성 동북방의 진절현秦節縣) 서각(西閣)에 있을 때 지은 연작시(連作詩)이다. <杜少陵詩集 卷17>
두릉치자[杜陵梔子] 두릉(杜陵)은 두보(杜甫)를 가리킨 것으로, 두보(杜甫)의 시 치자(梔子)에 “치자는 여러 꽃나무에 비교하면, 인간에 참으로 흔치 않은 것이로다. 몸에 있는 빛은 물감으로 쓰이고, 오장을 다스림엔 기가 조화를 이루네. 가을이면 붉은 열매를 취하고, 봄이면 푸른 가지도 구경하지. 내 무정하게 너를 옮겨온 까닭은, 강 물결에 비친 네 모습을 귀히 여겨서란다.[梔子比衆木, 人間誠未多. 於身色有用, 與道氣相和. 紅取風霜實, 靑看雨露柯. 無情移得汝, 貴在映江波.]”라고 하였다.
두릉태수[杜陵太瘦] 두릉은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이백(李白)의 시 희증두보(戱贈杜甫)에 “반과산 꼭대기에서 두보를 만났는데, 머리엔 대삿갓 썼고 해는 마침 정오로다. 묻노니 작별한 뒤로 어찌 그리 수척해졌나, 모두가 전부터 괴로이 시 읊조린 탓이로세.[飯顆山頭逢杜甫 頭戴笠子日卓午 借問別來太瘦生 總爲從前作詩苦]”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두릉팔애[杜陵八哀] 두보(杜甫)의 팔애시(八哀詩). 당(唐) 나라 때의 현신(賢臣)인 왕사례(王思禮)·이광필(李光弼)·엄무(嚴武)·왕진(王璡)·이옹(李邕)·소원명(蘇元明)·정건(鄭虔)·장구령(張九齡) 등 여덟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여 노래한 것이다. <杜少陵集 卷十六>
두릉포의[杜陵布衣] 두릉포의(杜陵布衣)는 두보(杜甫)의 별칭이다. 소릉(小陵)이라고도 한다.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에 한 선제(漢宣帝)의 능(陵)인 두릉(杜陵)이 있고, 그 동남쪽에 선제의 후비 허 황후(許皇后)의 능인 소릉이 있는데, 두보가 일찍이 소릉의 서쪽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자칭 소릉야로(少陵野老) 혹은 두릉포의라고 하였다.
두릉포의[杜陵布衣]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의 선조 두예(杜預)가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었으며, 두보 자신도 두릉에서 가까운 소릉(少陵)에서 산 적이 있었으므로 스스로 자신을 두포의(杜布衣), 소릉야로(少陵野老), 두릉원객(杜陵遠客) 등으로 불렀다. 두보가 장안(長安)에서 처자(妻子)가 있는 봉선현(奉先縣)으로 갈 때 쓴 ‘서울을 떠나 봉선현으로 가서 감회를 읊다[자경부봉선현영회自京赴奉先縣詠懷]]’라는 시에 “두릉에 한 사람 포의가 있으니, 나이 들수록 세상 뜻이 졸렬하네. 자기를 허여하는 것은 어찌 그리도 어리석은지, 내심으로는 직과 설에 견준다네.[杜陵有布衣, 老大意轉拙. 許身一何愚? 竊比稷與契.]”라는 말이 나온다.
두릉현인[杜陵賢人] 두릉 사람을 가리킨 것으로, 두릉(杜陵)은 장안(長安) 부근에 있는 한 선제(漢宣帝)의 능호(陵號)인 바, 두릉의 현인은 동계공(東溪公)을 가리킨 것이나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백(李白)의 제동계공유거(題東溪公幽居) 시에 “두릉의 현인은 청렴하기로 명성이 높은데, 동계에 집 짓고 산 지 해가 이미 오래이로다.[杜陵賢人淸且廉 東溪卜築歲將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두릉화죽[杜陵花竹] 한(漢)나라 장후(蔣詡)는 왕망(王莽)이 권력을 장악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화초를 가꾸며 대밭 가에 오솔길 세 갈래를 터놓고 의기가 맞는 양중(羊仲)과 구중(求仲)만 찾아오게 해서 함께 놀았다.
두릉희직설[杜陵希稷卨] 직설(稷卨)은 순(舜) 임금의 두 현신인 농관(農官) 기(棄)와 사도(司徒) 설(卨)을 합칭한 말로, 두보(杜甫)의 시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에 “두릉에 포의의 신하가 있으니, 늙어가매 뜻이 더욱 졸렬해져라, 몸을 기약함이 왜 그리 어리석은지, 맘속으론 후직과 설에 비교한다오.[杜陵有布衣 老大意轉拙 許身一何愚 竊比稷與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설(卨)은 설(契)과 동자로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