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목[杜牧] 만당(晩唐)의 문장가이자 시인으로 자(字)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 경조(京兆) 만년(萬年: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의 사족(士族) 출신이다. 고시(古詩)는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영향을 받아 사회와 정치에 관한 내용이 많다. 장편시는 필력이 웅장하고 장법(章法)이 엄정하며 감개가 깊다. 근체시(近體詩)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하였는데 서정적이며 풍경을 읊은 것이 많고, 격조가 청신(淸新)하고 감정이 완곡하고도 간명하다. 시어의 조탁(彫琢) 못지않게 내용을 중시했다. 병법에도 밝아 손자(孫子)에 주석을 내어 손자십가주(孫子十家註)에 들어 있다.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당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용병술을 논한 죄언(罪言)을 지어 황제에게 올린 바 있다. 26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황주(黃州), 지주(池州), 목주(睦州)에서 자사(刺史)를 지냈고, 사관수찬(史舘修撰)·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냈다. 중서성의 별칭이 자미성(紫微省)이었던 까닭에 사람들이 두자미(杜紫微)라고 불렀고, 사훈원외랑(司勛員外郞)을 지내서 두사훈(杜司勛)이라고도 불렀으며, 두보(杜甫)와 구별하기 위해 두보를 대두(大杜) 또는 노두(老杜)라고 하고 두목을 소두(小杜)라고 불렀고, 또 이상은(李商隱)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하여 소이두(小李杜)라고도 불렀는데 이백과 두보의 병칭인 이두(李杜)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안 남쪽 번천(樊川)에 있는 별장에서 지내게 된 만년에는 두번천(杜樊川)으로 불렸다. 두목은 당조(唐朝)에서 이름이 높은 경조두씨(京兆杜氏)로 서진(西晉)의 군사가인 두예(杜預)의 16세손이다. 두목과 두보는 같은 두예의 후예였지만 그 지파가 달랐는데, 두보는 두예의 아들 두탐(杜耽)의 후예였고, 두목은 두예의 다른 아들 두윤(杜尹)의 후예였다. 저작으로 번천문집(樊川文集) 20권이 있다.
두목[頭目] 공장의 우두머리인 작두(作頭)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부 중 우두머리인 파총(把摠) 따위이다.
두목[頭目] 관청의 노비를 통솔하는 두목 노비를 이른다. 노비 10구(口)마다 1구를 택하여 두목으로 정했다.
두목[頭目] 중국 사신(使臣)을 따라 무역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오던 북경(北京)의 상인(商人)을 이른다.
두목[頭目] 중국의 사신(使臣)을 수행하여 오던 군병의 우두머리로, 요동(遼東)에서 차출되는 것이 상례였다.
두목걸자운[杜牧乞紫雲] 당(唐)나라 사도(司徒) 이원(李愿)이 관직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살며 음악과 기생으로 호사하였다. 이원이 조정의 손님들을 청하여 높은 모임을 가졌었다. 두목(杜牧)이 헌부(憲府)의 벼슬에 있어서 감히 초청하지 못하니 두목이 좌객(座客)에게 이 모임에 참가하고 싶다는 뜻을 표하여 이원이 부득불 초청하였다. 두목이 남쪽 줄에 앉아서 주시(注視)하며 석 잔을 가득히 마시고는 이원에게 “자운(紫雲)이란 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이원이 가리키니 두목이 오래 쳐다보고는 “이름났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구나. 내게 주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두목광언경만좌[杜牧狂言驚滿座] 두목(杜牧)이 일찍이 낙양 분사어사(洛陽分司御史)가 되어 낙양에 있을 때, 전 상서(尙書) 이총(李聰)이 자기 집에 빈객들을 초청하여 주연을 성대히 베풀었다. 그때 100여 명이나 되는 기녀들 또한 미색이 뛰어났으므로 두목이 기녀들을 한참 주시하다가 묻기를 “자운(紫雲)이라는 기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누가 자운인가? 데려오라.”라고 하자, 이총은 얼굴을 숙이고 껄껄 웃고, 여러 기녀들은 모두 머리를 돌리고 파안대소를 하였다. 두목이 스스로 술 석 잔을 연거푸 마신 다음, 낭랑하게 읊조리기를 “오늘 화려한 집에서 화려한 주연을 베풀고, 누가 이 분사어사를 오라고 불렀느뇨? 갑자기 미친 말 지껄여 온 좌중을 놀래켜라, 두 줄로 에워싼 기녀들이 일시에 머리 돌리네.[華堂今日綺筵開 誰喚分司御史來 忽發狂言驚滿座 兩行紅粉一時回]”라고 하였는데 그 의기(意氣)가 방약무인(傍若無人)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事文類聚>
두목분고[杜牧焚稿] 두목(杜牧)은 당(唐) 나라 때 시인으로 자(字)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이다. 꿈에 어느 사람이 “너는 마땅히 마칠 필(畢) 자로 이름을 고쳐야 한다.”고 하였고, 그 후에 또 “흰 망아지가 저 골짜기에 있구나.[皎皎白駒在彼空谷]”라는 글귀를 써주는 꿈을 꾸고는 불길한 일이라 하여 스스로 묘지(墓誌)와 제문(祭文)을 짓고, 자기가 지은 글들을 모아서 불살랐는데 그해에 죽었다 한다. <新唐書 卷166> <舊唐書 卷147 杜牧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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