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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묘[豆苗], 두무[頭無], 두무[兠鍪], 두무[竇武]


두묘[豆苗]  콩 싹. 도연명(陶淵明)의 시 귀전원거(歸田園居)에 “남산 아래에 콩 심으니, 풀은 무성하고 콩 싹은 드문드문. 새벽에 일어나 잡초 김매고, 달빛 띠고서 호미 메고 돌아오네.[種豆南山下, 草盛豆苗稀.晨興理荒穢, 帶月荷鋤歸.]”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卷2 歸田園居>

두무[頭無]  무두악(無頭岳)이라고 한다. 한라산 정상에 분화구인 백록담이 있어서 정상이 없는 듯하므로 한라산 정상을 이렇게 부른다.

두무[兠鍪]  투구. 남제서(南齊書) 권29 주반룡열전(周盤龍列傳)에, 주반룡(周盤龍)이 오랑캐를 무찌르는 공을 세워 잇따라 작상(爵賞)을 받았는데, 제(齊)나라 세조(世祖 무제武帝)가 농담으로 말하기를 “경이 초선을 쓰는 것이 어찌 투구를 쓰는 것만 하겠는가.[卿着貂蟬 何如兜鍪]”라고 하니 “이 초선은 바로 투구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此貂蟬乃自兜鍪中出耳]”라고 대답하였다는 고사에서 보인다. 무장(武將)으로서 전공(戰功)을 세워 문관(文官)의 높은 관작(官爵)을 얻게 된 것을 비유한 말로, 초선(貂蟬)은 선문(蟬文)과 초미(貂尾)로 장식한 관(冠)이라는 뜻으로 문관을 가리키고, 투구는 무장을 가리킨다.

두무[竇武]  동한 시대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으로, 자는 유평(游平)이다. 후한(後漢) 초엽의 명신(名臣)인 두융(竇融)의 현손(玄孫)이다. 연희(延熹) 8년(165)에 두무의 장녀 두묘(竇妙)가 귀인(貴人)으로 뽑혀 궁으로 들어가자 두무는 낭중(郞中)이 되었다. 이해에 환제(桓帝)가 두귀인(竇貴人)을 황후(皇后)로 삼자, 두무는 월기교위(越騎校尉)로 승진하고 괴리후(槐里侯)에 봉해졌다. 이때 환제(桓帝)가 친정(親政)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환관들이 국정을 천단하자, 명망(名望)이 높은 이응(李膺), 범방(范滂), 진번(陳蕃) 등이 태학생들과 함께 청류(淸流)라 자칭하며 환관들과 대립하였다. 이에 환관들이 환제를 부추겨 연희(延熹) 9년(166) 청류의 당인(黨人) 2백여 명을 체포하고 다음 해에 금고령을 내려 이들을 종신토록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였는바, 이것이 제1차 당고(黨錮)의 옥사이다. 환제가 후사 없이 죽자, 두무는 두황후와 일을 꾸며 12세의 해독정후(解瀆亭侯) 유굉(劉宏)을 황제로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영제(靈帝)이다. 두무가 대장군이 되어 군권을 장악하고 태부(太傅) 진번(陳蕃)과 함께 조절(曹節)·왕보(王甫) 등 환관들을 모두 죽이려 하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반역죄로 몰려 자살하였다. 죽은 뒤 낙양 도정(洛陽都亭)에 효수되었고, 친척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는 등 멸족의 화(禍)를 당하였다. 이때 두무가 병영(兵營)에 들어가 북군(北軍)의 오교위(五校尉)의 병사 수천 명을 불러 모아 도정(都亭)에 주둔하였는데, 환관들이 장환(張奐)을 시켜 오영(五營)의 일부 병사들을 거느리고 두무를 토벌하게 하고, 또 환관들이 병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장환과 합세하여 두무의 병사들에게 큰소리로 고함치기를 “너희들은 금군(禁軍)으로서 와 마땅히 궁성(宮省)을 호위해야 하는데 무슨 이유로 두무를 따라 반란하는가.”라고 하니, 영부(營府)의 병사들이 평소 환관을 두려워하고 복종하였으므로, 두무의 병사들이 차츰 환관들의 편에 서서 두무의 거사 계획이 실패하였다. 이에 환관들이 다시 득세하여 이응(李膺), 두밀(杜密) 등을 주륙하고 당인과 태학생들을 대거 체포하였으며 이들과 관련이 있는 자들을 모두 폐출하거나 금고하였는바, 이것이 제2차 당고(黨錮)의 옥사이다. <후한서(後漢書) 권97 당고열전(黨錮列傳), 권99 두무열전(竇武列傳)>

두무[竇武]  두무(竇武)는 평릉(平陵) 사람으로 자(字)는 유평(游平)이다. 한 환제(漢桓帝)의 장인으로 괴리후(槐里侯)에 봉해졌다. 두무(竇武)는 젊어서부터 경행(經行)으로 이름이 났는데, 그의 딸이 후한 환제(桓帝)의 황후가 되면서 조정에 간여하여 후사 없이 환제가 죽자 영제(靈帝)를 옹립하였다. 환제(桓帝)를 이어 영제(靈帝)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두태후(竇太后)가 수렴청정하고 부친 두무(竇武)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연호를 건녕(建寧)으로 고쳤다. 이어 전에 태위(太尉)를 지낸 진번(陳蕃)을 태부(太傅)로, 호광(胡廣)을 상서(尙書)로, 왕창(王暢)을 사공(司空)으로, 이응(李膺)을 장락소부(長樂少府)로 삼는 등 천하의 명사를 대거 등용하자, 한나라의 기강이 다시 펴지리라는 기대를 걸기에 충분했다. 건녕 원년에 진번이 상소하여 두무와 함께 국정을 장악하고 천하를 어지럽히는 환관들을 처벌하기로 모의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그대가 잡아죽이면 그만인데 어찌 더 조사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진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환관들을 조사하며 태후에게 아뢰게 한 결과, 비밀이 누설되자 환관들이 친척들과 삽혈(歃血)의 맹세를 하고서 영제를 덕양전(徳陽殿)의 전전(前殿)으로 이끌고 상서(尙書)를 협박하여 조서를 위조해 써서 왕보(王甫)를 황문령(黃門令)으로 제수하였다. 왕보 등은 부절을 가지고 군사를 동원하여 먼저 진번을 잡아 죽이고, 대항하는 두무를 포위하니 두무가 자살하였다. 이에 두무 등을 도정(都亭)에서 효수(梟首)하고 종친과 빈객 등을 체포하여 모두 처형하고, 두태후를 남궁(南宮)의 운대(雲臺)로 옮겨 유폐하였다. 이 사건으로 환관이 더욱 득세하자 천하의 지사(志士)들이 태평의 희망을 접게 되었다. <後漢書 卷8 靈帝紀, 卷99 竇武列傳> <史略 卷3 東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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