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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고[杜武庫], 두무동[杜蕪洞], 두무악[頭無岳], 두무진번[竇武陳蕃], 두무하진[竇武何進]


두무고[杜武庫]  매우 박학다식(博學多識)함을 뜻한다. 진(晉)나라 두예(杜預)는 학식이 깊고 넓어 마치 무기 창고에 온갖 병장기들이 구비되어 있는 것과 같이 모르는 것이 없다하여 두무고(杜武庫)라고 불리었으며, 문신이면서도 용병술에 뛰어나 안서 군사(安西军司)와 진남 대장군(鎭南大將軍) 등을 지냈다. 진서(晉書) 권34 두예전(杜預傳)에 “두예는 몸은 말에 올라타지도 못하고 활을 쏘면 갑옷을 뚫지도 못했으나, 매번 큰일에 임할 때마다 번번이 장수의 대열에 처하였다.[預身不跨馬, 射不穿札, 而每任大事, 輒居將率之列.]”라고 하였다.

두무동[杜蕪洞]  제주 남문로에 있는 동네로 동서로 뻗은 골목 이름이 두뭇골이다. 제주 남방 해변에서 해채(海採)를 생업으로 하는 제주인(濟州人)들은 조주(操舟)·잠수(潛水)에 능하였다.

두무악[頭無岳]  두무악은 본디 한라산(漢拏山)의 이명(異名)이다. 무두악(無頭岳)이라고 한다. 한라산 정상에 분화구인 백록담이 있어서 정상이 없는 듯하므로 한라산 정상을 이렇게 부른다. 두무악(頭無嶽)

두무진번[竇武陳蕃]  두무(竇武)는 후한(後漢) 환제(桓帝)의 황후인 두태후(竇太后)의 아버지로 환제가 죽은 뒤에 영제(靈帝)를 옹립하였다. 진번(陳蕃)은 자가 중거(仲擧)로, 국정을 보필하고 명현(名賢)을 임용하였으며, 사람됨이 방정하고 준엄하여 한말(漢末)의 사풍(士風)이 그로 인해 기절(氣節)을 숭상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환관 조절(曹節) 등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두무하진[竇武何進]  두무(竇武)와 하진(何進). 모두 후한(後漢) 때 황실의 외척으로, 당시 국권(國權)을 쥐고 있던 환관(宦官)들을 주살하려다 실패하였다. 두무는 후한 환제(桓帝)의 장인이고, 두무의 딸 두 태후는 환제가 죽자 영제(靈帝)를 맞아들여 황제로 세웠다. 하진은 영제의 처남이다. 두무(竇武)는 환제(桓帝)의 국구(國舅)로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훌륭하여 명성이 높았다. 환제(桓帝)가 후사 없이 죽자 영제(靈帝)를 영립(迎立)하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진번(陳蕃)과 함께 국정(國政)을 맡았다. 태부(太傅) 진번(陳蕃)이 은밀히 두무(竇武)에게 말하기를 “중상시(中常侍) 조절(曹節)과 왕보(王甫) 등이 환제(桓帝) 때부터 국권(國權)을 쥐고 나라를 혼란시켜 왔으니, 지금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뒤에는 반드시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이들을 주륙할 것을 두무(竇武)와 모의하였다. 두무(竇武)는 황제에게 아뢰어 조절(曹節) 등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계책이 누설되어 왕보(王甫) 등이 천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두무(竇武)와 대치하였다. 그러나 두무(竇武)의 군사들이 차츰 왕보(王甫)에게 귀순하여 결국 두무(竇武)는 패주하였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진(何進)의 누이는 영제(靈帝)의 황후가 되었는데, 헌제(獻帝) 때에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있던 하진(何進)은 사람들이 모두 환관(宦官)을 미워하는 것을 알고 이들을 제거할 것을 은밀히 도모하였는데, 원소(袁紹)가 또다시 계책을 내어 사방의 용맹한 장수들을 많이 불러오게 하였다. 하진(何進)은 동탁(董卓) 등을 불러 관중(關中)에 주둔하게 하였으나, 오랫동안 결행하지 못하다가 계책이 그만 누설되고 말았다. 환관(宦官)인 장량(張讓)은 상시(常侍) 단규(段珪) 등 수십 명을 상서성(尙書省) 안에 매복시키고, 황제의 명령을 위조하여 하진(何進)을 불러 상서성(尙書省)에 들어오게 한 다음 체포하고 가덕전(嘉德殿) 앞에서 참수하였다. 원소(袁紹)는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자 북궁(北宮)의 문을 걸어 잠근 뒤에 군대를 거느리고 환관(宦官)을 체포하여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 이후로 한(漢)나라는 점점 쇠퇴하여 결국 멸망하였다. <後漢書 竇武何進傳> 중상시(中常侍)와 상시(常侍)는 환관(宦官)의 관명이다. 후한서(後漢書) 두하열전(竇何列傳) 끝에 “두무(竇武)와 하진(何進)은 원구(元舅)라는 자리에 의지하고 정치를 보좌하는 권력에 의거하여 안으로는 태후(太后)가 조정에 군림하는 위엄에 기대고 밖으로는 뭇 영웅들의 바람을 타는 듯한 기세를 맞았으나, 끝내 환관들에 의해 일은 어그러지고 몸은 죽었으며 공은 허물어져 마침내 세상이 슬퍼하는 바가 되었다. 어찌 지혜(智慧)가 부족한데 권세(權勢)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겠는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말하기를 ‘하늘이 상(商)을 폐한 지 오래되었는데 주군(主君)께서 흥기시키려고 하고 계십니까?’라 하였다. 이는 송 양공(宋 襄公)이 홍(泓)에서 패한 까닭이다.”라는 논평(論評)이 붙어 있다. 소순(蘇洵)은 송 양공(宋襄公)이 하늘의 뜻을 어겨 실패한 일과 두씨(竇氏)·하씨(何氏)의 패인을 나란히 든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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