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두묵[杜默], 두문각소[杜門却掃], 두문동[杜門洞], 두문불출[杜門不出], 두문사객[杜門辭客]


두묵[杜默]  두묵(杜默)은 송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사웅(師雄)이고 역양(歷陽) 사람이다. 시가(詩歌)를 잘 지었다. 그의 시는 당시 구양수(歐陽修)와 함께 인기가 있기는 했으나 율(律)이 잘 맞지 않았다. 두묵(杜默)은 남의 시(詩)를 읊는 데는 뛰어났으나 직접 지은 시(詩)는 엉터리였다는 데서 유래하여 두찬(杜撰)라는 말이 생겼다.

두묵[竇默]  원(元)나라 때 학자로, 초명은 걸(傑), 자는 한경(漢卿)이었는데, 이름을 묵(默)으로 바꾸고 자를 자성(子聲)으로 고쳤다. 광평(廣平) 비향(肥鄕) 사람이다. 요추(姚樞)·허형(許衡) 등과 함께 송대 경학을 연구하였다.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 그의 어짊을 듣고 불러 치도에 대하여 물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며, 후에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를 역임하였다. 원초에 경학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두문[斗門]  강의 수위를 조절하는 갑문(閘門). 제방에 설치한 것으로, 갑자기 불어난 홍수를 흘려보내는 갑문(閘門)을 말한다.

두문[杜門]  문을 닫다. 문을 막다. 밖으로 나다니지 않으려고 집이나 방의 문을 닫아 막음. 술가(術家)가 점치는 팔문(八門) 가운데의 하나로 구궁(九宮)의 사록(四綠)이 본자리가 되는 흉한 문을 이르기도 한다.

두문[豆門]  토문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지명이다.

두문각소[杜門却掃]  대문을 닫고서 정원의 길도 쓸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서 오직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위(北魏)의 이밀(李謐)이 “대문을 닫고서 정원의 길도 쓸지 않았으며,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않은 채 독서만 일삼았다.[杜門却掃 棄産營書]”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魏書 卷90 逸士列傳 李謐>

두문경[竇文卿]  주자문도(朱子門徒)의 한 사람인 두종주(竇從周)로, 문경(文卿)은 그의 자(字)이다. 송(宋)나라 진강(鎭江) 단양(丹陽) 사람이다. 50세가 넘어서 주희(朱熹)에게 가서 배웠고, 돌아와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宋元學案 卷69>

두문동[杜門洞]  두문동(杜門洞)은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 광덕산(光德山)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왕조의 충신들이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않고 외부와 차단하며 모여 살던 곳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고려의 신하 72인이 개성의 동남쪽 고개에 조복을 벗어 두고 이 골짜기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숨었는데 나오게 하려고 마을에 불을 질렀으나 모두 타 죽고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두문동(杜門洞) 72현(賢).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 72인을 말하는 것으로, 두문동 태학생(太學生) 72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72인의 성명이 모두 전하지는 않고, 임선미, 조의생(曺義生), 성사제, 박문수,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의 성명만 전한다.

두문불출[杜門不出]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집에만 틀어박혀 사회(社會)의 일이나 관직(官職)에 나아가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에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임공으로 가서 말과 수레를 모두 팔아 술집 하나를 사들여 술장사를 했다. 문군에게는 노(鑪: 흙을 쌓아올려 술을 담을 수 있는 화로)에 앉아 술을 팔도록 하고, 상여 자신은 독비곤(犢鼻褌)을 입고 머슴들과 함께 허드렛일을 하고 저잣거리에서 술잔을 닦았다. 탁왕손은 이 소문을 듣고 부끄러워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相如與俱之臨邛, 盡賣其車騎, 買一酒舍酤酒, 而令文君當爐. 相如身自著犢鼻褌, 與保庸雜作, 滌器於市中. 卓王孫聞而恥之, 爲杜門不出.]”라고 한 데서 보인다.

두문불출[杜門不出]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음. 곧, 집안에만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 않음. 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다는 데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은거(隱居)함을 말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의 충신들이 두문동(杜門洞: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의 옛 지명)에 모여 살면서 일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두문사객[杜門辭客]  문을 닫아두고 내왕을 하지 않음. 악비(岳飛)의 원옥(寃獄)이 일어났을 때, 한세충(韓世忠)이 분연히 일어나 진회(秦檜)에게 항거하며 화의론(和議論)을 통박한 결과 파직되어 예천관사(禮泉觀使)로 쫓겨난 뒤부터, 문을 닫아걸고 빈객을 사절[杜門辭客]한 가운데, 가끔 나귀를 타고 술병을 손에 든 채 아이 종 한두 명을 데리고 서호(西湖)를 마음껏 노닐면서 스스로 즐기곤 하였다. 그리하여 끝내는 진회(秦檜)로부터 해를 받는 일을 면하였다. 만년에는 특히 불교와 노장(老莊)을 좋아하며 청량거사(淸涼居士)라고 자호(自號)하였다. <宋史 卷364>

두문정[杜文貞]  당대(唐代) 시인 두보이다. 원 순제(順帝) 지정(至正 2년에 일찍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추서되었다.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