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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미관유[斗米官遊], 두미삼전[斗米三錢], 두미육십근[斗米肉十斤], 두미절요[斗米折腰]


두미[斗尾]  斗尾(두미)는 豆尾(두미)로도 표기하는데, 한강 상류의 골짜기 이름이다. 지금의 팔당대교 상류에 위치했으니, 검단산(黔丹山) 동쪽을 지나는 유역이다.

두미[斗尾]  경기도 양주군(楊州郡)과 광주군(廣州郡) 사이로 흐르는 한강 상류 부근을 가리킨다. 두미협(斗尾峽)이라고도 한다.

두미[斗尾]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상팔당과 봉안마을 사이에 있고 옛날부터 두미나루가 있었다. 지금은 와부읍에 속해 있으며 남양주시 두미마을 앞의 두미천을 끼고 흐르는 강을 두미강(斗尾江)이라고 한다.

두미[斗湄]  지금 한강(漢江) 하류 두물머리 일대이다.

두미[斗米]  두미(斗米)는 다섯 말의 쌀인 오두미(五斗米)의 약칭으로, 하급 관료의 낮은 봉급을 뜻한다.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오두미의 낮은 봉록을 받는 팽택 현령(彭澤縣令)이 된 지 겨우 80여 일이 되었을 때, 마침 군(郡)의 독우(督郵)가 순시(巡視)를 나오게 되어 현리(縣吏)가 도연명에게 의관을 갖추고 독우를 뵈어야 한다고 하자, 도연명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오두미(五斗米)의 하찮은 녹봉 때문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我不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라고 하고는, 즉시 인끈을 풀어 던지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고향인 율리(栗里)로 돌아갔다고 한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陶潛>

두미강[斗尾江]  지금의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의 경계 지점 두미 마을 앞의 강 이름이다. 예로부터 잉어 얼음 낚시터로 유명했다.

두미관유[斗米官遊]  얼마 안 되는 급료(給料)를 받기 위(爲)하여 관리(官吏)가 되어 고향(故鄕)을 멀리 떠나 근무(勤務)함을 이른다.

두미삼전[斗米三錢]  당 태종(唐太宗) 때에 쌀이 워낙 풍부해져서 쌀 한 말에 값이 삼전이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당나라 태종이 즉위하자 연 3년 동안 흉년이 들어 쌀 한 말에 비단 1필 값이 되었는데, 정관(貞觀) 4년(630)에 대풍이 들어 쌀 값이 폭락하고 기근이 완전히 풀리었다고 한다.

두미육십근[斗米肉十斤]  쌀 한 말과 고기 열 근, 사람의 대식(大食)을 이른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염파(廉頗)가 사자를 만나 한 끼의 식사에 쌀 한 말과 고기 10근을 먹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 쓸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頗見使者, 一飯斗米肉十斤, 被甲上馬, 以示可用.]”라고 한 데서 보인다.

두미절요[斗米折腰]  닷 말 쌀에 허리를 굽힘.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이 팽택 영(彭澤令)으로 있을 때, 마침 군(郡)의 독우(督郵)가 현(縣)을 순시하게 되어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을 갖추고 독우를 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도잠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하찮은 오두미(五斗米) 녹봉 때문에 허리를 굽혀서 향리의 소인을 섬길 수 없다.[我不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라 하고, 마침내 현령의 인끈을 풀어 던지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어 자신의 뜻을 피력하고 즉시 전원으로 돌아갔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94 隱逸>

두미지교[斗米之敎]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말한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장릉(張陵)이 사천(四川) 지방에서 창시한 종교, 또는 그 교단이다. 사천의 곡명산(鵠鳴山)에서 장생(長生)의 도를 닦고,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오두미(五斗米)를 내게 한 데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

두미포[斗尾浦]  두미강(斗尾江)이나 두미협(斗尾峽)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두미마을 앞을 흐르는 강이다.

두미협[斗尾峽]  한강 상류에 있던 지명으로, 지금의 팔당댐 부근에 있던 북한강(北漢江)과 남한강(南漢江)이 만나는 부근을 칭한다. 두미(斗尾), 두미(斗迷), 두릉(斗陵) 등으로도 칭해졌다.

두미호[杜尾湖]  경기도 남양주시 두물머리 부근으로, 두미호(杜美湖) 혹은 두미강(斗尾江)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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