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杜甫]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두릉야로(杜陵野老), 두릉포의(杜陵布衣) 등이 있다. 진(晉)의 유명한 학자 두예(杜預)의 자손으로 초당(初唐)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의 손자이다. 양양(襄陽) 지방 출신으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40대인 천보(天寶) 14년(755년)에야 비로소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당시 장안에서 반군에게 잡혔다가 탈출, 숙종(肅宗)의 진영에 합류하여 좌습유(左拾遺)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낸 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두습유(杜拾遺), 두공부(杜工部) 등으로 불렀고, 또 장안성 밖 소릉(少陵)의 초당(草堂)에서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두소릉(杜少陵), 두초당(杜草堂)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는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함께 이두(李杜)로 불렸는데, 두목(杜牧)과 이상은(李商隱)의 합칭인 소이두(小李杜)와 구별하기 위해 대이두(大李杜)라고도 부른다. 문학을 발판 삼아 벼슬로 나아가려던 그의 꿈이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짧은 한때를 빼고는 평생을 가난과 병으로 고생을 겪어야 했다. 두보가 난리를 만나 뇌양에 우거(寓居)하고 있던 중 악묘(嶽廟)에 놀러간 일이 있었는데, 폭우가 내려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길이 막혀 여러 날을 굶었다. 이에 뇌양의 섭령(攝令)이 배를 타고 건너가 두보를 데려와서 쇠고기와 술을 대접하였는데 그날 저녁에 죽었다. 벼슬살이와 달리 문학, 특히 시에서 이룬 성취가 대단하였다. 각종 시가 형식을 운용하는 데 뛰어난 중에 특히 율시(律詩)를 잘 지었는데, 다양한 풍격 중에서도 침울함을 노래한 것이 특히 많다. 남긴 시가 1500여 수에 달하며 작품집으로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있다. 후세 사람들에게 그 자신은 시성(詩聖)으로, 또 그의 시는 시사(詩史)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두보[杜甫] 당(唐)나라 때의 위대한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이고, 중년에 장안(長安) 교외 소릉(少陵)에 살았기 때문에 자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라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두소릉(杜少陵)이라고 불렀다. 하남(河南)의 공현(鞏縣: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공의시鞏義市)에서 태어났다. 당현종 천보(天寶) 연간에 장안(長安)에 이르러 벼슬길에 나갈 것을 모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십여 년 동안 곤궁하게 살았다.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胄曹參軍)이라는 작은 직위를 얻었으나, 곧이어 일어난 안사의 난을 맞아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좌습유(左拾遺)가 되었다. 그러나 직책을 버리고 촉(蜀)으로 들어가 성도(成都)에서 검남절도사 엄무(嚴武) 밑에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냈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두공부(杜工部)라고 부르게 되었다. 만년에는 온 가족이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도중에 기주(夔州)에서 2년을 머물다가 삼협(三峽)을 나와 악(鄂), 상(湘) 일대를 떠돌다가 가난과 질병으로 세상을 떴다. 두보는 성당의 시기를 거쳐 당의 국력이 쇠퇴하는 시기를 살았는데, 그의 시에는 불안한 사회와 어두운 정치 현실, 그리고 백성의 질고를 노래한 것이 많아서 그의 시는 한편으로 시사(詩史)로도 불린다. 두보는 같은 시기를 살았던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더불어 당(唐)을 대표하는 시인의 하나로 꼽히며 시성(詩聖)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는데, 신악부(新樂府)의 길을 열어 신악부운동의 발전을 촉진시켰을 뿐 아니라, 그의 오칠고장편(五七古長篇)은 시와 역사로 읽히며 시가예술에서 높은 성취를 이뤄냈다. 당대의 가장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으로 꼽히는 그는 이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병칭되었다. 작품에 북정(北征), 병거행(兵車行) 등 1400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세상에 전한다.
두보[杜保]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는 계량(季良)인데, 자로써 행세(行世)하였다. 그는 특히 의협심이 강하기로 유명하였다. <後漢書 卷24>
두보구해방관[杜甫求解房琯] 방관(房琯)이 병마절도사로 적을 치는데 춘추의 전법(戰法)을 모방하여 수레로 영(營)을 만들었다. 적이 불을 놓아 태워 버리니 크게 패하여 사졸 4만을 잃었다. 방관이 행재소로 달려가서 죄를 청하였을 때 두보(杜甫)가 포의(布衣)의 친구였으므로 신구하니, 당 현종이 용서하였다.
두보구해방관[杜甫求解房琯] 안녹산의 난에 두보(杜甫)의 친구 방관(房琯)은 전법(戰法)을 잘못 사용하여 크게 패하였고 또 식객으로 있던 동정란(董廷蘭)이 방관의 세력을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다가 법에 저촉되자 재상의 직에서 파면되었다. 이에 두보가 상소하여 “죄가 가벼운데 대신을 파면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라고 하였는데, 황제가 노하여 두보를 치죄토록 명하였고, 재상 장호(張鎬)가 “만약 두보를 죄로 다스리면 언로를 끊게 됩니다.”라 하고, 설득하여 형벌을 면하였다. <당서(唐書) 권200 두보전(杜甫傳)>.
두보궐[杜補闕] 이백(李白)의 벗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보궐(補闕)은 관직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