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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頭辭], 두사[蠹死], 두사[斗槎], 두사인[杜舍人], 두사훈[杜司勳], 두산[斗山], 두삼[竇參]


두사[頭辭]  첫머리 말. 두사(頭辭)는 문서의 서두 부분에 의례적·형식적으로 기록하는 말이나 앞서 받은 문서 내용을 재차 인용하여 기록한 것을 가리킨다.

두사[蠹死]  나무굼벵이의 죽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 차운만금삼수정박옹[次韻漫唫三首呈泊翁]에 “칠십 년 세월이 새 그림자같이 훌쩍 지나라, 새봄에 회고해 보니 아득히 슬픔만 남네. 개똥벌레 좀 벌레 죽음을 어디에 의뢰할까, 범이나 용의 죽음도 괴이할 것 없다오.[七十年光鳥影過, 新春回首漭含悲, 螢枯蠹死終何賴, 虎逝龍亡便不奇.]”라고 하였고, 포박자(抱朴子)에 “나무를 베면 기생하던 덩굴이 마르고, 풀을 베면 새삼이 시들고, 냇물에 게가 돌아오지 않으면 장구벌레가 망하고, 뽕나무를 자르면 나무굼벵이가 죽는다.[伐木而寄生枯, 芟草而兔絲萎. 川蟹不歸而蛣敗, 桑木見斷而蠹殄.]”라고 하였다.

두사[斗槎]  두우성(斗牛星)에 가는 배로,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는 은하수와 바다가 서로 통해 있었는데, 바닷가에 사는 어떤 사람이 10여 일을 뗏목을 타고 가다가 한 성(城)에 이르러 물가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 한 장부(丈夫)를 만나 여기가 어디인가를 물으니, 그 장부가 답하기를 “그대가 촉군(蜀郡)에 가서 엄군평(嚴君平)을 찾아가 물어보면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촉군에 가서 엄군평에게 물으니 “모(某)년 모월 모일에 객성(客星)이 견우수(牽牛宿)를 범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그 사람이 은하수에 도착한 때였다고 한다. <博物志 卷10>

두사인[杜舍人]  두 사인(杜舍人)은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일찍이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낸 두목(杜牧)을 가리키는데, 두목은 풍채가 좋아서 술에 취해 양주(揚州)를 지날 때면, 길가 청루의 기생들이 다투어 귤을 던져 그의 탄 수레에 가득했다고 하는 고사가 있다. 또, 두목이 호주(湖州)에서 노닐 적에 10여 세 되는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 흠뻑 빠진 나머지, 10년 안에 다시 돌아와 가약(佳約)을 맺겠다면서 폐백을 듬뿍 주고 떠나갔다. 14년 뒤에 돌아와 보니 그 여인이 벌써 시집을 가서 두 아들을 낳기까지 하였으므로 “꽃을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이 한스러워, 그때에는 꽃봉오리 피어나지도 않았었네. 지금은 바람에 날려 꽃잎도 다 흩어진 채, 푸른 잎 그늘 이루고 가지엔 열매만 가득하네.[自恨尋芳到已遲, 往年曾見未開時. 如今風擺花狼藉, 綠葉成陰子滿枝.]”라는 탄화시(歎花詩)를 읊었다고 한다. <唐詩紀事 杜牧> 그의 시 산행(山行)이 유명한데 그 시에 “멀리 차가운 산 비스듬한 돌길을 따라 오르니, 흰 구름 깊은 곳에 인가가 있네. 수레 멈추고 앉아 늦가을 단풍 완상하노라니, 가을 단풍잎이 이월 꽃보다 더 붉구나.[遠上寒山石逕斜 白雲深處有人家 停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라고 하였다.

두사충[杜師忠]  두사충(杜師忠)은 중국 두릉(杜陵) 사람으로 임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나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 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다. 대구 시내에서 경산으로 통하는 대로변 오른쪽 형제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모명재(募明齋)는 두사충의 후손이 선조를 위해 세운 것이다.

두사훈[杜司勳]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을 가리킨다.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이다. 일찍이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을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대중(大中) 2년(848) 3월에 조정에 들어가 사훈원외랑(司勛員外郞), 사관수찬(史官修撰)이 되었다.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며, 또 작품이 두보(杜甫)와 비슷하다 하여 소두(小杜)로 불린다.

두산[杜山]  두산(杜山)은 전라도 만경(萬頃)의 옛 지명이다.

두산[斗山]  두산(斗山)은 태산북두(泰山北斗)의 준말로서, 학술이나 명망이 태산이나 북두칠성처럼 높고 찬란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당서(新唐書) 권176 한유열전(韓愈列傳) 찬(贊)에 “한유가 죽은 뒤로 그의 말이 널리 행해져서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았다.[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如泰山北斗]”라고 하였다.

두삼[竇參]  두참. 당 나라 사람으로, 중서시랑 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를 지냈는데, 조정에서 당을 만들어서 재물에 대한 탐욕이 극심하여 집에 필백(匹帛)을 가득 쌓아두었다 한다. 뒤에 조카인 두신(竇申)의 일에 연좌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만년위(萬年尉)로 있을 때, 당일 숙직을 서야 하는 동료가 부모님께서 아프다는 말을 듣고 당황해하자 대신 서 주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감옥에 있던 죄수가 도망을 가서 경조윤(京兆尹)이 당직 장부에 따라 동료를 탄핵하자, 두참은 상황이 급하여 미리 휴가 신청을 하지 못하고 집에 가서 자신이 대신 섰던 것이니 자신이 벌을 받겠다고 하여 마침내 강하위(江夏尉)로 폄적되었다. <新唐書 卷145 竇參列傳>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29 仕進部 同官 同列代貶>

두삼책[杜三策]  산동 동평현(東平縣) 출신으로 자는 의재(毅齋)이며 천계(天啓) 연간(1621~1627)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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