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씨[竇氏] 옛날에 과국(過國)의 요(澆)가 짐관(斟灌)을 죽이고서 짐심(斟鄩)을 공격하여 하후(夏后: 하夏나라 임금) 상(相)을 멸망시켰다. 이때 하후(夏后) 상(相)의 아내 후민(后緡)이 임신 중이었는데 수챗구멍으로 도망쳐 나와 잉(仍)나라로 가서 소강(少康)을 낳았다. 소강(少康)이 두 아들 저(杼)와 용(龍)을 낳았는데, 용(龍)이 그대로 잉국(仍國)에 살면서 두(竇)를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元年, 新唐書 宰相世系表>
두씨[竇氏] 후한 초기에 유명한 외척 일가인데, 처음 두융(竇融)이 광무제(光武帝) 때에 등용되기 시작한 후로 그 일가가 한 조에 벼슬하였으며, 그 중에도 장제(章帝)·환제(桓帝)의 왕후가 모두 두씨이므로 두씨의 세력은 더욱 조정에 충만하게 되었다.
두씨석보[杜氏石譜] 석보(石譜)는 돌의 품목(品目)을 차례대로 열기(列記)한 것인데, 일찍이 운림거사(雲林居士) 두계양(杜季陽)이 이 석보(石譜)를 편찬했다고 한다.
두씨세족보[杜氏世族譜] 진(晉)나라 두예(杜預)가 왕실(王室)과 제후(諸侯)의 세계(世系)와 족류(族類)를 기재하여 만든 보책(譜冊)이다.
두씨오룡[竇氏五龍] 두씨(竇氏)의 오룡(五龍). 북송의 두의(竇儀)는 학문과 인격으로 유명하였는데, 그의 동생인 두엄(竇儼)·두간(竇侃)·두칭(竇偁)·두희(竇僖)도 모두 연달아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들 형제를 두씨 오룡이라고 하였다. <宋史 卷263 竇儀列傳>
두씨지부[竇氏之婦] 전진(前秦) 때 안남장군(安南將軍) 두도(竇滔)의 아내인 소씨(蘇氏)를 이른다. 두도는 일찍이 총애하는 첩 조양대(趙陽臺)를 딴 곳에 두고 사랑하였는데, 소씨가 이것을 알고 조양대를 때려 모욕을 주었다. 이에 두도는 크게 노하여 임지(任地)인 양양(襄陽)으로 가면서 조양대만 데리고 갔다. 이에 소씨는 200여 수의 시를 비단에 수놓아서 남편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남편의 용서를 애원하는 것이었으며 종횡으로 모두 문장이 이루어지는 회문체였다. 두도는 이것을 보고 그 절묘함에 감탄하여 마침내 소씨를 맞이하였다. <侍兒小名錄>
두씨춘추[杜氏春秋] 두씨(杜氏)는 진(晉)나라 두예(杜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몹시 즐겨 스스로 좌전벽(左傳癖)이 있다고 하였다. 저서로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 석례(釋例), 춘추장력(春秋長曆) 등이 있다.
두씨통전[杜氏通典] 당(唐)나라 두우(杜佑)가 편찬한 책으로 200권으로 되어 있다. 식화(食貨)·선거(選擧)·직관(職官)·예(禮)·악(樂)·병(兵)·형(刑)·변방(邊防)의 8문(門)으로 나누어 황우(黃虞) 시대에서 당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이르기까지 유질(劉秩)의 정전(政典)>서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 모두 75책 200권이다.
두씨통전[杜氏通典] 두씨(杜氏)는 당(唐)나라의 정치가이자 사학자 두우(杜佑)로, 자는 군경(君卿)이며, 덕종(德宗)·순종(順宗)·헌종(憲宗) 때에 벼슬을 하여 사도(司徒), 동평장사(同平章事) 등을 지냈다. 통전(通典)은 두우가 편찬한 정서(政書)로, 상고(上古)시대부터 당나라 현종조(玄宗朝)까지의 역대 제도를 식화(食貨)·선거(選擧)·직관(職官)·예(禮)·악(樂)·병(兵)·형(刑)·주군(州郡)·변방(邊防)의 각 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두씨합장[杜氏合葬] 두씨(杜氏)가 서계(西階) 아래에 장사 지낸 일을 이른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계무자(季武子)가 집을 지었는데, 두씨의 무덤이 그 집의 서쪽 계단 아래에 있었다. 두씨의 후손들이 합장(合葬)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계무자가 허락하였다. 두씨의 후손들이 계무자의 집에 들어가서 감히 곡(哭)을 하지 못하자, 계무자가 ‘합장은 고례(古禮)가 아니지만, 주공 이래로 합장하는 예가 고쳐지지 않았다. 내가 합장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곡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슨 도리이겠는가.’라고 하고 곡하도록 명하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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