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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엄[竇儼], 두엄달이[頭掩達伊], 두여칭모[斗餘稱耗], 두여회[杜如晦]


두엄[竇儼]  송(宋)의 어양(漁陽) 사람으로 자는 망지(望之)이다. 오대(五代)부터 북송 때까지 활약한 관료이다. 후진(後晉)에서 진사(進士)가 되었다. 송초(宋初)에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서 국가 의례를 주관하였다. 재주가 높고 글을 잘했으며 박학다식하여 당시의 사사(祀事)·악장(樂章)·종묘(宗廟)·시호(諡號)등 제도에 관하여도 많은 것을 찬정(撰定)하여 주위로부터 해박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宋史 卷二百六十三>

두엄달이[頭掩達伊]  두룽다리, 추위를 막기 위해 머리에 쓰는 일종의 쓰개이다.

두여[杜輿]  자는 자사(子師)이고 우이현(盱貽縣) 사람이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에게 배웠고 그의 이름과 자 모두 소식이 지어주었다. 조보지(晁補之)가 두여자사명자서(杜輿子師名字序)란 글에서 “우이현 두군은 미산선생에게 배웠는데, 선생이 그의 이름을 여라고 하고 자는 자사라 지어주었다.[盱眙杜君, 從學於眉山先生, 先生名之, 曰輿, 字之, 曰子師.]”라고 하였다. 소식의 시는 ‘수재 두여가 소나무 키우는 방법을 배우려 하기에[予少年頗知種松 手植數萬株 皆中梁柱矣 都梁山中 見杜輿秀才求學其法 戲贈 二首]’라는 시가 있다.

두여방[杜與房]  당 태종(唐太宗)을 도와 정관(貞觀)의 치적을 구현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두여회(杜如晦)와 방현령(房玄齡)이다. 방모두단(房謀杜斷)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태종조의 쌍벽이었다. <唐書 卷九十六>

두여칭모[斗餘稱耗]  두여(斗餘)와 칭모(稱耗).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90 후주기(後周紀) 1에서 “두여(斗餘)는 한 말을 재서 받고 그 나머지를 더 받는 것이며 칭모(稱耗)는 무게를 달고 나서 또 손실이 있다고 핑계를 대며 더 많이 받는 것이다. 이제 모두 혁파하니 왕장이 가렴주구했던 폐단을 바로잡은 것이다.[斗餘 槩量之外 又取其餘也 稱耗 稱計斤鈞石之外 又多取之以備耗折 今悉除之 矯王章苛歛之弊也]”라고 하였다. 즉 두여나 칭모는 모두 부세를 받을 때 규정한 액수 이외에 별도로 더 받는 것으로서 가렴주구를 상징하는 말이다.

두여회[杜如晦]  당(唐)나라 초엽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극명(克明)이다. 당태종(唐太宗) 때의 재상으로, 방현령(房玄齡)과 함께 조정의 정사를 맡아서 당나라의 법률제도와 인사행정을 정비하여 입안에 대한 추진자로서 방현령과 더불어 정관지치(貞觀之治)를 구축하여 두 사람 모두 현신으로 칭송되었다. 두여회는 결단을 잘 내리고 현령은 계책을 잘 꾀했으므로, 양상(良相)을 칭할 때에는 반드시 방두(房杜)를 일컬었다고 한다.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의 병조참군(兵曹參軍)으로 있다가 후에 문학관학사(文學館學士)를 겸했다. 이세민을 따라 출정하여 참모로 활약했으며, 이세민이 태자가 되자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고 채국공(蔡國公)에 봉해졌다. 정관(貞觀) 2년(628)에 이부상서(吏部尙書), 이듬해 우복야(右僕射)가 되어 관리 선발을 담당하였으며, 당나라의 법률 제도와 인사 행정을 정비하였다. 사후에 내국공(萊國公)으로 이봉되었으며, 시호는 성(成)이다. 태종(太宗)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에 병조 참군(兵曹參軍)을 시켰더니 갑자기 섬주 총관부(陝州總管府) 장사(長史)로 좌천되었다. 그때 방현령(房玄齡)이 태종에게 말하기를 “부료(府僚) 중에 다른 사람은 물러나도 아깝지 않으나 두여회(杜如晦)는 총명하고 지식이 달통하여 왕좌[王位]의 재주입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놀라며 “네 말이 아니었더라면 이 사람을 잃어버릴 뻔했다.”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96>

두역[痘疫]  마마. 천연두(天然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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