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연[杜衍] 송(宋)나라 월주(越州) 산음(山陰) 사람으로, 자는 세창(世昌)이다. 여러 지군(知郡)을 거쳐 어사중승(御史中丞), 추밀사(樞密使)에 이르렀고, 한기(韓琦), 부필(富弼)과 함께 모든 폐단을 혁파한 후 평장사(平章事), 태자소사(太子少師)를 역임했다. 80세에 세상을 떠나 사도겸시중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뒤에 기국공(祁國公)에 봉해졌다. 성품이 강직 엄정하여 이민(吏民)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이부 시랑(吏部侍郞)으로 재직시 인종(仁宗)이 은명을 내리면 대부분 시행하지 않고 놓아두었다가 조지(詔旨)가 십수 장에 이르면 인종에게 돌려주었다. 당시 간관(諫官)으로 있던 구양수(歐陽脩)가 입대하자 인종은 “바깥 사람들은 두연이 내지(內旨)를 봉하여 돌려준다고 아는가? 나에게 요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두연이 안 된다고 하여 그만둔 경우가 봉하여 돌려준 것보다 많다.”라고 하였다. <宋史 卷310 杜衍列傅> <東都史略 卷56> <隆平集 55>
두연[杜衍] 송대(宋代)의 명신(名臣)이다. 자는 세창(世昌)이며, 봉호(封號)는 기국공(祁國公)이다. 1044년 동평장사(同平章事),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를 거쳐 재상이 되었다. 부필(富弼), 범중엄(范仲淹) 등과 함께 당시 조정을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 관리의 부정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청렴하고 강직하여 신하들과 상의하지 않고 임금 뜻대로 명을 내리는 조서인 내강(內降)의 관례를 올바른 정치의 길을 막는 행위라고 판단하고, 임금의 조서(詔書)가 수십 장이 쌓이도록 방치했다가, 봉한 채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인종(仁宗)도 이런 그를 기개(氣槪) 있는 행동으로 칭찬하였는데, 임금의 교지를 왜곡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던 반대파는 마침 두연의 사위인 소순흠이 공금을 유용한 사건을 빌미삼아 그를 탄핵하고, 재상에 오른 지 70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두연[杜衍] 북송(北宋) 월주(越州) 산음(山陰) 사람으로 자(字)는 세창(世昌),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진사(進士) 갑과(甲科)를 거쳐 경력(經曆) 3년(1043) 리부시랑추밀사(吏部侍郞樞密使)가 되어 부필(富弼), 범중엄(范仲淹) 등과 함께 폐정을 개혁하였다. 다음 해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태자소부(太子少傅)로 치사(致仕)하였다. 기국공(祁國公)에 봉해졌다. 옥송(獄訟) 심리를 잘했고, 특히 관리의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 청렴한 정치가로 이름이 났다. 조서(詔書)를 10여 회나 도로 봉하여 황제 앞에 바친 일로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은 신하의 표본으로 후세에 알려졌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전집(前集) 권7에, 두연이 집에서 식사할 때 면(麵) 한 그릇과 밥 한 사발뿐이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검소함을 찬미하자 “나는 본래 일개 가난한 선비일 뿐이다.……늘 덕에 비해 식록(食祿)이 많을까 두려운데 어찌 감히 내 한 몸 봉양하는 데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두연[杜衍] 송(宋)나라 진종(眞宗)·인종(仁宗) 때의 사람으로 자는 세창(世昌),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진사 출신으로 지건주(知乾州), 섬서전운사(陝西轉運使), 어사중승(御史中丞), 추밀사(樞密使) 등을 역임하였다. 서실(書室)을 담복관(薝蔔館)이라 하였다. 외군(外郡)을 다스릴 때 신중하고 치밀하게 하고, 위엄과 형벌로 관리들을 감독하지 않았는데도 관리와 백성들이 그의 청렴하고 정돈된 것에 두려워하였다. 이에 인종(仁宗)이 특별히 불러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제수하였는데, 여러 폐단을 개혁하고 치사(致仕)한 뒤 기국공(祁國公)에 봉해졌다. 송사(宋史) 두연전(杜衍傳)에 “거란이 조원호(趙元昊)와 황하(黃河) 밖에서 전쟁을 벌이자 참지정사(參知政事) 범중엄(范仲淹)이 하동(河東)을 안무하고 있으면서 군대로 대응하려고 하였다. 두연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막 교전을 벌이고 있으니 형세상 반드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군대는 함부로 출동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범중엄이 황제 앞에서 논변하여 두연을 비판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격렬하였다. 그렇지만 두연은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두연년[杜延年] 두연년(杜延年)은 한나라 소제(昭帝) 때 사람으로, 자가 유공(幼公)인데, 간대부(諫大夫)로 있을 적에 상관걸(上官桀)과 연왕 단(燕王旦)의 모반(謀反)을 고한 공으로 건평후(建平侯)에 봉해졌다. 기린각 11공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비 두주(杜周)가 있던 관부의 직임을 맡았을 때 감히 아비가 서던 자리에 서지 못하고, 앉거나 누웠던 자리를 다 바꾸었다고 한다. <漢書 卷60 杜周傳>
두연면반[杜衍麵飯] 두연(杜衍)의 면(麵) 한 그릇과 밥 한 사발. 두연(杜衍)은 송(宋)나라 인종 때의 명신으로 자는 세창(世昌),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평소 그의 생활이 청렴하고 검소하였는데,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전집(前集) 권7에, 두연이 집에서 식사할 때 면(麵) 한 그릇과 밥 한 사발뿐이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검소함을 찬미하자 “나는 본래 일개 가난한 선비일 뿐이다.……늘 덕에 비해 식록(食祿)이 많을까 두려운데 어찌 감히 내 한 몸 봉양하는 데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두연빈염한[杜衍鬢髯寒] 송(宋)나라 두연(杜衍)이 노년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남경(南京)에 살면서 왕환(王渙), 필세장(畢世長), 주관(朱貫), 풍평(馮平)과 더불어 오로회(五老會)를 맺어 시와 술로 서로 사귀었다. 다섯 노인이 모두 80여 세의 고령인데도 정정하여 세인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澠水燕談錄 高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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