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두영[竇嬰], 두예[杜預], 두예[杜乂], 두예벽[杜預癖]


두영[竇嬰]  한(漢)나라 때 효문황후(孝文皇后) 당형(堂兄)의 아들이다. 효문황후(孝文皇后)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효문황후가 죽자 세력을 잃었다. 한 경제(漢景帝) 3년 오(吳)·초(楚) 등 7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두영은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제·조의 군대를 관할하였고, 세류(細柳)의 군영(軍營)으로 유명한 주아부(周亞夫)는 태위(太尉)로 출정하여 평정하였다. 칠국의 난이 진압되자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졌다. 무제 즉위 초에 승상에 올라 유학을 숭상하고 도학을 배척하여 두태후(竇太后)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두영이 대장군(大將軍)이었을 때 전분은 제랑(諸郞 낭관)으로서 두영의 집에 드나들면서 아들이나 손자의 태도로 두영을 모셨다. 그러나 승상이 되고서는 두영을 억누르면서 끝내 모함하여 죽였다.

두영[竇嬰]  두영(竇嬰)은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두태후(竇太后)의 조카뻘 되는 친족으로, 경제(景帝) 때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평정하여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는 경제(景帝)로부터 “불편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황제에게 보고하라.”는 유조(遺詔)를 받았는데, 무제(武帝) 때 옥에 갇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조카를 시켜 무제에게 글을 올려 경제에게 유조를 받은 일을 말하고 황제를 뵙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문서를 관리하는 상서부(尙書府)에 경제의 유조가 없어, 오히려 유조를 위조했다는 죄명을 쓰게 되고 얼마 뒤에 참수되었다.

두예[杜預]  진(晉)나라 문제(文帝: 사마소司馬昭)·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원개(元凱)이며 시호는 성(成)이다. 하남 윤(河南尹)·진주 자사(秦州刺史)를 역임하고 탁지상서(度支尙書)에 이르렀는데, 만기(萬機)를 손익(損益)함이 이루 셀 수 없었다. 그래서 조야(朝野)가 두무고(杜武庫)라 불렀다. 뒤에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를 지냈다. 오(吳)를 평정한 공으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졌다. 두예는 문신(文臣)이었으나 용병(用兵)에는 제장(諸將)이 따르지 못하였다. 공을 이룩한 뒤에는 경적(經籍)에만 전심하였는데 특히 좌전(左傳)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에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 춘추석례(春秋釋例), 춘추맹회도(春秋盟會圖), 춘추장력(春秋長歷)이 있다. 진서(晉書) 권34 두예열전(杜預列傳)에 “두예가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여 항상 말하기를 ‘높은 언덕은 골짜기로 변하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으로 변한다.’고 하였다. 이에 자신의 공적을 두 개의 비에다 새겨 하나는 양양(襄陽)의 만산(萬山) 아래 물속에다 넣어 놓고 하나는 현산(峴山)의 위에다 세운 다음에 말하기를 ‘나중에 언덕이 되고 골짜기가 될 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두예[杜預]  두예(杜預)는 자가 원개(元凱)로,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함녕(咸寧) 4년(278)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 진양양(鎭襄陽)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계속 표(表)를 올려 오(吳)나라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용병(用兵)에 능하여 장수들 중에 두예만한 사람이 없었다. 오(吳)를 쳐서 큰 공을 세웠고, 뒤에는 경적(經籍)에 잠심(潛心)하였다. 오를 칠 때에 기병(奇兵) 8백을 밤에 몰래 강 건너로 보내어 낙군(樂郡)를 기습하고 기치(旗幟)를 많이 벌이고 파산(巴山)에 불을 피우고서 요해지(要害地)로 나와, 적의 사기를 꺾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공으로 당양후(當陽侯에 봉해졌다. 모략(謀略)에 능해 두무고(杜武庫)로 일컬어졌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몹시 좋아하여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 및 춘추장력(春秋長歷)을 지었다. 진서(晉書) 두예열전(杜預列傳)에 “두예는 너무나 약하여 말에 걸터앉지도 못하고 활을 쏘아도 얇은 종이를 뚫지 못한다.[預身不跨馬射不穿札]”라고 하였다.

두예[杜預]  진(晉)나라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원개(元凱), 시호는 성(成)이다. 하남 윤(河南尹)과 탁지상서(度支尙書)의 벼슬을 하였다. 무슨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앞뒤를 요량했으므로 실패하는 일이 적었다. 오(吳)나라 정벌을 도와 양호(羊祜)의 뒤를 이어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으로 양양(襄陽)에 진주해 있으면서 백성을 동원하여 수리 시설을 하여 1만여 경(頃)의 전답을 관개함으로써 두부(杜父)로 일컬어졌다. 태강(太康) 원년에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공로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졌다. 학식이 넓고 모략이 많아 사람들이 두무고(杜武庫)라고 일컬었다. 스스로 좌전벽(左傳癖)이 있다고 하였는데,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를 저술하였다. 부평진교(富平津橋)를 설치하였고, 하수(夏水)를 열어 영·계(零桂)의 조운을 통하게 하였다. 두예가 고을을 다스릴 때, 서울의 귀족들을 자주 대접하였는데, 혹자가 그 까닭을 묻자, 두예는 “다만 그들이 해를 끼칠까 염려한 것이지,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吾但恐爲害 不求益也]”라고 대답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34 杜預列傳>

두예[杜乂]  자는 홍리(弘理)이다. 진남장군(鎭南將軍) 두예(杜預)의 손자이며 동진(東晉) 성제(成帝)의 비(妃)인 성공황후(成恭皇后)의 부친이다. 성품이 화순(和純)하고 용모가 뛰어나 강좌(江左)에 명성을 떨쳤다. 요절하여 함강(咸康) 초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목(穆)이다.

두예벽[杜預癖]  벽(癖)은 너무 치우치게 좋아하는 것을 이른 말로, 즉 두예(杜預)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대단히 애독했음을 뜻한다. 두예가 항상 왕제(王濟)는 말을 좋아하는 벽[馬癖]이 있고, 화교(和嶠)는 돈을 좋아하는 벽[錢癖]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진 무제(晉武帝)가 그 사실을 듣고 한번은 두예에게 이르기를 “경은 무슨 벽이 있는가?”라고 하자, 두예가 대답하기를 “신에게는 좌전(左傳)의 벽이 있습니다.[臣有左傳癖]”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太平御覽>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