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예병모[杜預兵謀] 두예(杜預)의 병모(兵謀). 두예는 진(晉)나라 두릉(杜陵) 태생으로, 자는 원개(元凱)이다. 박학다식하여 조야(朝野)가 그를 두무고(杜武庫)라고 일컬었으며, 문신이면서도 용병술(用兵術)에 뛰어나 형주 도독(荊州都督)과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등을 지냈다. 사후에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에 추증되었고,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전공하여 주해(註解)를 남겼다. <晉書 卷34 杜預列傳>
두예불과마[杜預不跨馬] 두원개(杜元凱)가 몸은 말에 올라타지도 못함. 원개는 진(晉)나라 두예(杜預)의 자로, 이 내용은 진서(晉書) 권34 두예전(杜預傳)에 “두예는 몸은 말에 올라타지도 못하고 활을 쏘면 갑옷을 뚫지도 못했으나, 매번 큰일에 임할 때마다 번번이 장수의 대열에 처하였다.[預身不跨馬, 射不穿札, 而每任大事, 輒居將率之列.]”라고 하였다. 두예는 학식이 깊고 넓어 마치 무기 창고에 온갖 병장기들이 구비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두무고(杜武庫)라고 불리었으며, 문신이면서도 용병술에 뛰어나 안서 군사(安西军司)와 진남 대장군(鎭南大將軍) 등을 지냈다.
두예비[杜預碑] 진서(晉書) 권34 두예열전(杜預列傳)에 “두예가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여 항상 말하기를 ‘높은 언덕은 골짜기로 변하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으로 변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공적을 두 개의 비에다 새겨 하나는 만산(萬山)의 아래 물속에다 넣어 놓고 하나는 현산(峴山)의 위에다 세운 다음 말하기를 ‘나중에 언덕이 되고 골짜기가 될 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두예원개[杜預元凱] 진(晉)나라의 두예(杜預)를 가리킨다. 원개(元凱)는 그의 자(字)이다. 하남윤(河南尹), 진주자사(秦州刺史) 등을 역임하고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이 되었는데, 유일하게 삼국시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오(吳)나라를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무제(武帝)의 신임을 받았으며 형주(荊州)를 총괄하는 직위에 봉(封)해졌다.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수도 낙양으로 돌아오다 사망하였다.
두예작영[杜預斫癭] 진서(晉書) 두예전(杜預傳)에 “두원개(杜元凱)가 오(吳)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강릉(江陵)을 공격할 때, 오나라 사람들이 그의 목에 혹이 있는 것을 알고는 개의 목에 박을 걸어서 놀리고, 큰 나무에 혹처럼 붙어 있는 옹이를 모두 하얗게 깎아버리고는 ‘두예의 목이다.’라고 써 놓았다. 그러자 두예가 평정한 후 그곳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杜元凱攻江陵, 吳人知預病癭,憚其智計, 以瓠繫狗頸示之. 每大樹似癭, 輒斫使白, 題曰 ‘杜預頸’. 及城平, 盡捕殺之.]”라고 하였다. <晉書 卷34 杜預列傳>
두예정다갈[頭銳釘多曷] 머리가 뽀족한 못의 다갈.
두예제이비[杜預制二碑] 둔재한람(遯斋闲览)에 “두예는 비석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물 속에 빠뜨렸다. 수백 년 후에 물이 언덕으로 변하면 비석이 나타나리라는 생각에서였다.[杜預制二碑 一沉水中 虑數百年後 水爲陵 則碑出]”라고 두예가 비석 두 개를 만든 고사가 실려 있다.
두예좌전벽[杜預左傳癖] 벽(癖)은 너무 치우치게 좋아하는 것을 이른 말로, 즉 두예(杜預)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대단히 애독했음을 뜻한다. 두예가 항상 ‘왕제(王濟)는 말을 좋아하는 벽[馬癖]이 있고, 화교(和嶠)는 돈을 좋아하는 벽[錢癖]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진 무제(晉武帝)가 그 사실을 듣고 한번은 두예에게 이르기를 “경은 무슨 벽이 있는가?”라고 하자, 두예가 대답하기를, “신에게는 좌전의 벽이 있습니다.[臣有左傳癖]”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太平御覽>
두예침비[杜預沈碑] 진(晉) 나라 때 오(吳) 지역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운 두예(杜預)가 형주(荊州)를 지키는 대장으로 있으면서, 부하들과 함께 현산(峴山)에 올라가 탄식하기를 “이 산은 항상 있건마는 이 산에 놀던 사람은 천추 뒤에 누가 알겠는가.”하고, 비석(碑石) 돌을 만들어 자기의 사적을 새겨서, 하나는 산 위에 세워 두고, 하나는 후일에 산천이 변하여 산이 못이 되고, 못이 육지가 될 때를 예상하여 연못 속에 던져두었다. 진서(晉書) 권34 두예전(杜預傳)에 “두예는 후세에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여 항상 말하기를 ‘높은 언덕은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이 되기까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돌을 깎아서 두 개의 비석을 만들고 그 훈적(勳績)을 썼는데, 하나는 만산(萬山) 아래에 묻고 하나는 현산(峴山) 위에 세우면서 ‘어찌 이후에 언덕과 골짜기가 되지 않을 줄 알리오?’라고 하였다.[杜預好後世名. 常言: ‘高岸爲穀, 深穀爲陵.’ 刻石爲二碑記其勳績, 一沉萬山之下, 一立峴山之上曰: ‘焉知此後不爲陵穀乎?’]”라고 하였다.
두예현산[杜預峴山] 진(晉)나라 때 오(吳) 지역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두예(杜預)는 평소 후세에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였다. 이에 일찍이 자신의 공을 새긴 비석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현산(峴山)의 물 아래에다 파묻고, 하나는 북담(北潭)에다 파묻고는 말하기를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구릉이 될 수도 있다.[高岸爲谷, 深谷爲陵.]”라고 하였다. <晉書 卷34 杜預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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