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우검광[斗牛劍光] 두우는 남두성(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을 이르고, 검광은 고대의 명검인 용천검(龍泉劍)의 빛을 이른다. 진(晉)나라 때 문장가로서 천문(天文)과 방기(方技) 등의 글에도 정통했던 장화(張華)가 일찍이 남두와 견우 사이에 자줏빛의 기운이 쏘아 비추는 것을 보고는, 그 기운의 출처인 예장(豫章)의 풍성현(豐城縣)에 친구인 점성가 뇌환(雷煥)을 보임시켜, 그로 하여금 풍성의 옛 감옥 터를 발굴하여 마침내 춘추 시대 간장(干將)과 막야(莫耶) 부부가 제작했다는 용천(龍泉)과 태아(太阿) 두 보검을 찾아내게 했더니, 그 후로는 자줏빛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한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두우검기[斗牛劍氣] 두우성에 칼 기운이 있음. 문장의 광채가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비추던 명검의 광채와 같다는 말이다. 두우(斗牛)는 견우(牽牛), 북두(北斗)의 두 별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때 문장가로 천문(天文), 방기(方技) 등의 글에도 정통했던 장화(張華)가 일찍이 북두와 견우 사이에 ‘자줏빛의 서기[紫氣]’가 쏘아 비추는 것을 보고는, 그 서기의 출처인 예장(豫章)의 풍성현(豐城縣)으로 자기 친구인 뇌환(雷煥)을 보임시켜 그로 하여금 풍성의 옛 옥사(獄舍) 터를 발굴해서 마침내 춘추 시대 간장과 막야 부부가 제작했다는 용천(龍泉), 태아(太阿) 두 보검을 찾아내었고 장화(張華)가 그중 하나를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참고로,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물건의 정화는 천연의 보배이니 용천검의 광채가 우성과 두성의 자리를 쏘아 비추고, 사람의 걸출함은 땅이 영수하기 때문이니 서유가 진번의 걸상을 내려놓게 했다.[物華天寶, 龍光射牛斗之墟, 人傑地靈, 徐孺下陳蕃之榻.]”라고 하였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두우광[斗牛光] 두우(斗牛)는 북두(北斗)와 견우(牽牛)를 가리킨다.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의 문장가로 천문(天文), 방기(方技) 등의 글에도 정통했던 장화(張華)가 일찍이 북두와 견우 사이에 자기(紫氣)가 뻗치는 것을 보고, 뇌환(雷煥)을 그 서기(瑞氣)의 출처인 예장(豫章)의 풍성현(豐城縣)으로 보내 풍성현의 옛 옥사(獄舍) 터를 발굴해서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명검(名劍)을 얻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물건의 정화는 천연의 보배이니 용천검의 광채가 북두와 견우의 자리를 쏘아 비추고[物華天寶 龍光射牛斗之墟]”라고 하였다.
두우균[竇禹鈞] 오대후진(五代後晉) 때 사람으로 후주(後周)의 계주(薊州) 어양(漁陽) 사람이다. 어양이 옛날 연(燕)나라 땅이었으므로 자(字)를 연산(燕山)이라 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두십랑(竇十郞)이라고 불렀다. 오대 후기의 대신이자 장서가로 형 두우석(竇禹錫)과 함께 사학(詞學)으로 이름을 날렸다. 만당 말기에 유주연(幽州掾)을 시작으로 제주(齊州), 등주(鄧州), 안주(安州) 등 여덟 개 주의 지사판관(支使判官)을 거쳤고, 후주(後周)에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끝으로 벼슬을 떠났다. 의기가 높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며, 가법(家法)이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다. 일찍이 의숙(義塾)을 세우고는 1만 권의 장서(藏書)를 모은 다음 유현(儒賢)을 초빙해서 원근의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가난한 선비들의 살림을 돌보아 주었다. 아들 가운데 다섯 사람이 서로 잇따라서 등과하여 연산두씨오룡(燕山竇氏五龍)이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宋史 卷263 竇儀列傳>
두우기[斗牛箕] 두성(斗星)과 우성(牛星)과 기성(箕星)을 이른다. 두성(斗星)과 우성(牛星)은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으로,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북방(北方)에 위치하고 있고, 기성(箕星)은 이십팔수 가운데 동방(東方)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북두성의 옆에 자리하고 있다. 한유의 시 삼성행(三星行)에 “내가 태어날 제, 달은 남두에 머물고, 우성은 뿔을 세우고, 기성은 입을 벌렸다오.[我生之辰, 月宿南斗. 牛奮其角, 箕張其口.]”라고 하였고, 소식의 시 증건주술사사진신(贈虔州術士謝晉臣)에 “죽은 뒤에 사람들이 계정혜를 전하고, 태어날 때 별자리가 두우기를 만났어라.[死後人傳戒定慧, 生時宿直斗牛箕.]”라고 하였다. <韓昌黎文集 卷4> <東坡全集 卷25>
두우륙[杜郵戮] 두우(杜郵)라는 곳에서 죽인다는 말로, 충신이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뜻한다. 진(秦)나라 소왕(昭王) 때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는 한(韓)과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후일 소왕이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무안군은 당시의 정세를 들어 이에 반대하였는데, 소왕은 왕릉(王陵)을 시켜 마침내 한단을 치게 했다. 그러나 9개월에 걸친 포위전에도 불구하고 한단은 함락되지 않고, 진나라 군사는 오히려 연합군의 공격에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이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과 함께 수십만 명의 군사로 진나라 군사를 공격한 것이다. 이때 무안군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진나라가 나의 계책을 듣지 않더니 이제 어떻게 되었는가?”하였다. 진왕은 이 말을 듣고 성내어 억지로 무안군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그러나 무안군은 병을 핑계로 이에 응하지 않았다. 화가 난 왕은 무안군을 파면하여 졸병의 대오에 편입하고, 음밀(陰密)에 옮기게 하였다. 무안군은 병으로 옮기지 못하고 석 달을 그 곳에 머물렀는데, 그 사이 연합군의 공격이 심하여 진나라 군사는 패전을 거듭하였다. 그러자 진왕은 사람을 시켜 무안군을 함양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였다. 무안군이 마침내 함양을 떠나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두우(杜郵)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진왕은 응후(應侯)를 비롯한 군신들과 무안군에 관하여 상의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백기가 옮겨 가면서도 그 뜻은 오히려 원망하여 심복하지 않고 있다.”고 하자, 진왕은 드디어 사자를 보내 무안군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무안군이 칼을 잡고 죽으려 하면서 “내가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 오늘 이 지경에 이르는가?”하고는, 뒤에 다시 “내 본래 죽어야 마땅할 것이다.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항복해 온 조나라의 군사 수십만 명을 속여 죄다 구덩이에 생매장해 죽였으니, 내가 죽지 않으면 누가 죽어야 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스스로 자결하였다. 무안군은 일찍이 장평의 싸움에서, 포위전 끝에 굶주림에 지쳐 항복해 온 조나라 군사들을 ‘조나라 사졸은 믿을 수 없다’하여 계책을 써서 생매장하고, 어린아이들만 돌려보낸 일이 있었던 것이다. 두우륙(杜郵戮)이란 무안군이 두우에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위와 같은 내용에서 비롯된 말이다. 진나라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불쌍히 여겨 향읍에서는 모두 그를 제사지냈다 한다. <史記 白起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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