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우풍[竇右風] 후한(後漢) 평릉(平陵) 사람인 우부풍(右扶風) 두융(竇融)으로, 하서(河西)를 바치고 광무제(光武帝)에게 귀의하자 광무제(光武帝)가 그의 조상 분묘에 태뢰(太牢)로써 제사 지내게 하였다. <後漢書 卷23 竇融傳>
두우혼[杜宇魂] 타향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임금을 슬퍼하는 말이다. 두우혼(杜宇魂)이란 두우의 넋이란 뜻으로, 옛날 촉제(蜀帝) 두우(杜宇)가 타향에 나갔다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 그의 넋이 새로 화했다고 하는데, 이 새가 피를 토하며 비통하게 울어대므로 이 새를 촉제의 이름을 따서 두우(杜宇: 두견새)라고 하였다 한다.
두운[杜韻] 두운(杜韻)이란 두보(杜甫)가 지은 시의 운(韻)을 그대로 쓴 것을 이른다.
두운[杜雲] 신라 말기의 승려. 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는 용문산(龍門山)에서 수도하였으며, 870년(경문왕 10) 용문사를 창건하였다. 883년(헌강왕 9)에는 소백산에 있는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하였다. 왕건(王建)이 남쪽을 지나다가 두운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으며, 936년(태조 19)에는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두원[頭黿] 자라 머리. 당(唐) 나라 때 화성(畫聖)으로까지 일컬어졌던 오도자(吳道子)는 특히 공자(孔子)의 초상(肖像)을 비롯해서 불화(佛畫)들을 많이 그렸는데, 소식(蘇軾)이 오도자의 불화를 예찬한 시에 “오랑캐 임금 귀신 우두머리 천명 만명이 서로 밀치고 다퉈 들어와 머리가 자라 같구나.[蠻君鬼伯千萬萬 相排競進頭如黿]”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四>
두원[杜園] 두보(杜甫)의 동산을 이른다.
두원개[杜元凱] 서진(西晉)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인 두예(杜預)로, 원개(元凱)는 자(字)이다. 사마소(司馬昭)의 매부(妹夫)이다. 진대(晉代)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진주 자사(秦州刺史)·진남 대장군(鎭南大將軍)등을 역임하였다. 무제(武帝) 때에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에 제수되어 남방의 주군(州郡)을 복속시켰다. 공을 이룬 뒤에 경적(經籍)에 심취하여 박학다식하였으며, 특히 좌전(左傳)을 좋아하여 스스로 좌전벽(左傳癖)이 있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가 있다. 춘추학으로서의 좌씨학을 집대성하였고, 좌씨전(左氏傳)을 춘추학의 정통적 위치로 올려놓았다. 두예는 학식이 깊고 넓어 마치 무기 창고에 온갖 병장기들이 구비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두무고(杜武庫)’라고 불리었으며, 문신이면서도 용병술에 뛰어나 안서 군사(安西军司)와 진남 대장군(鎭南大將軍) 등을 지냈는데, 양호(羊祜)의 뒤를 이어 강한(江漢) 지방의 군대를 맡아서 양호가 한 것처럼 갑옷을 입지 않은 채 항상 가벼운 옷을 입고 허리띠를 느슨히 풀어놓고 있었는데도 군사들이 정제(整齊)되어서 오(吳)나라를 평정하였다. 후대에는 풍도(風度)가 한적(閑適)하고 옹용(雍容)한 사람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진서(晉書) 권34 두예전(杜預傳)에 “두예는 몸은 말에 올라타지도 못하고 활을 쏘면 갑옷을 뚫지도 못했으나, 매번 큰일에 임할 때마다 번번이 장수의 대열에 처하였다.[預身不跨馬, 射不穿札, 而每任大事, 輒居將率之列.]”라고 하였다.
두원개[杜元凱] 원개(元凱)는 진(晉) 나라 두예(杜豫)의 자(字)이다. 진 문제(晉文帝)의 누이동생인 고륙공주(高陸公主)에게 장가들어 벼슬길에 진출한 뒤, 하남 윤(何南尹), 진주 자사(秦州刺史)를 역임하고 탁지 상서(度支尙書)에 이르렀으며, 진 무제(晉武帝) 때 양호(羊祜)의 천거로 그의 후임으로 대장군이 되어 병략(兵略)을 발휘하여 오(吳) 나라를 평정하고 무공을 세웠으며, 군공(軍功)으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졌다. 그가 자신의 훈명(勳名)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싶어 하였는데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구릉이 될 수도 있다.[高岸爲谷 深谷爲陵]”라고 하면서, 자기의 공적을 새긴 비석 두 개를 만든 뒤에 하나는 만산(萬山)의 아래에 두고 하나는 현산(峴山) 위에 세웠다는 고사가 전한다. 박학하여 두루 통했으며,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몹시 즐겨 스스로 좌전벽(左傳癖)이 있다고 하였다. 말년에는 경적(經籍)에 침잠하여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 석례(釋例), 춘추장력(春秋長曆) 등 다수의 책을 저술하였다. 좌전집해(左傳集解)는 가장 이른 시기의 좌전(左傳) 주해(注解)였다. <晉書 卷34 杜預傳>
두원개현정[杜元凱峴亭] 두원개(杜元凱)의 현정(峴亭). 이른바 현산비(峴山碑)를 가리킨다. 원개는 진(晉)나라 두예(杜預)의 자(字)이다. 그가 자신의 명성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싶어 하였는데,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구릉이 될 수도 있다.[高岸爲谷 深谷爲陵]”라고 하면서, 자기의 공적을 새긴 비석 두 개를 만든 뒤에, 하나는 만산(萬山)의 아래에 두고 하나는 현산(峴山) 위에 세웠다고 한다. <晉書 卷34 杜預列傳>
두원객[杜源客] 번뇌의 근원을 막은 사람. 한산시(寒山詩)에 “본래 도를 닦는 무리를 사모하여, 그들과 항상 친하였네. 때로 번뇌 끊인 이를 만나기도 하고, 매양 선을 말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였네.[本志慕道倫, 道倫常獲親. 時逢杜源客, 每接話禪賓.]”라고 한 데서 보인다.
두원관[杜原欵] 춘추 시대 진 헌공(晉獻公)의 태자 신생(申生)의 스승이다. 신생(申生)은 헌공이 몹시 총애하던 애첩(愛妾)인 여희(驪姬)가 태자 신생을 죽이려고 계책을 꾸며서 신생이 아버지 헌공을 독살하려 했던 것처럼 만들자, 이에 헌공은 노하여 태자의 스승 두원관(杜原款)을 죽였다. 어떤 사람이 신생에게 사실을 밝혀 억울한 누명을 벗으라고 권하자, 신생은 “내가 사실을 밝히면 여희의 죄가 드러날 것이다. 아버님은 이미 늙으셨으니, 아버님으로부터 여희를 빼앗고 싶지 않다.”고 하였고, 또 도망치라고 권하자, “아버님을 죽이려 했다는 더러운 누명을 쓰고 내가 다른 나라로 도망친들 그 나라에서 나를 받아 주겠느냐.” 하고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신생을 공세자(恭世子)라 불렀다. <春秋左傳 僖公4年>
두원적적[杜園寂寂] 두보(杜甫)가 살림이 어려웠던 때를 이른 것이다. 신당서(新唐書) 권201 두보열전에 “진주에서 객지 생활을 할 적에는 직접 땔나무를 하고 상수리와 밤을 주워 먹으며 살기도 하였다.[客秦州 負薪採橡栗自給]”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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