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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위[杜位]  양양(襄陽) 사람으로 재상 이임보(李林甫)의 사위이며 두보(杜甫)와는 집안 동생뻘이다. 엄무(嚴武)의 막부에서 참군으로 있다가 천보(天寶) 11년(752) 말 이임보 사후 신주(新州)로 좌천되었다. 십 년 후에 기주사마(夔州司馬)로 돌아왔고, 사훈원외랑(司勛員外郞)을 지냈다.

두위[竇韋]  한유(韓愈)의 시에 동두위심유존사불우(同竇韋尋劉尊師不遇)라는 시가 있는데, 시를 지었을 당시 낙양령(洛陽令)이었던 두모(竇牟)와 하남령(河南令)이었던 위집중(韋執中)을 가리킨다. 그 전문에 “도연명이 몇 년을 살았다고 말한 곳, 도화원도 여기처럼 깊은 곳이었겠지. 돌아갈 때는 오리 타고 날아갈 생각하며, 찾아올 때 바람 타고 날아오듯 왔는데. 문 닫힌 도량에 노을빛만 차 있어, 솔숲으로 늙은 학을 찾으러 가볼까 하다가. 어딘가에 모습을 감추고 있을지 몰라서, 귀한 복 훔칠 마음 감히 낼 수 없었네.[秦客何年駐, 仙源此地深. 還隨躡鳧騎, 來訪馭風襟. 院閉靑霞入, 松高老鶴尋. 猶疑隱形坐, 敢起竊桃心.]”라고 하였다.

두위랑[杜韋娘]  당(唐)대의 저명한 가기(歌妓). 두위랑(杜韋娘)은 당시 유명한 기녀인 동시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노래이기도 하다. 당(唐) 나라 유우석(劉禹錫)이 화주자사(和州刺史)에서 면직되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사공(司空) 이신(李紳)이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어 주었는데, 유우석이 가기(歌妓)에게 마음이 끌려 “궁중 미녀처럼 곱게 꾸민 머리 모습, 봄바람처럼 두위랑 한 곡조 들려 주네. 사공께선 실컷 즐겨 들어서 시들하겠지만, 강남 땅 자사는 애간장이 끊어지오.[髾髮梳頭宮樣妝 春風一曲杜韋娘 司空見慣渾閑事 斷盡江南刺史腸]”라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 부르자, 이 사공이 그 가기를 그에게 내주었던 고사가 있다. <本事詩 情感>

두위향(杜韋鄕]  위씨(韋氏)와 두씨(杜氏)가 함께 사는 마을이다. 두보(杜甫)의 시 증위칠찬선(贈韋七贊善)에 “향리의 벼슬아치로 어진 이 적지 않으니, 두릉과 위곡과 미앙궁(未央宮) 터 앞이로세.[鄕里衣冠不乏賢 杜陵韋曲未央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두유[竇攸]  동한(東漢) 광무(光武)의 신하. 광무가 영대(靈臺)에서 잔치를 벌였을 때, 표문서(豹文鼠 얼룩쥐)가 발견된 것을 두유가 알아 냈다하여 비단 1백 필을 하사했다 한다. 위략(魏略) 권8에 “세조(世祖)가 영대(靈臺)에서 신하들을 모아 놓고 연회를 열었는데, 반짝반짝 광택이 나는 쥐가 나왔다. 세조가 이상히 여겨 물어보았으나 대답하는 신하가 없었다. 두유가 대답하기를 ‘그 쥐의 이름은 종(鼨)입니다.’라고 하니, 세조가 묻기를 ‘어떻게 알았는가?’라고 하자, 두유가 대답하기를 ‘이아(爾雅)에 나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조가 비서각(祕書閣)으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였으므로 매우 기뻐하여 비단을 하사하였다. 그 뒤로 제후의 자제들이 두유를 찾아가 이아(爾雅)를 배웠다.”라고 하였다.

두유강계각색미[頭有韁繫脚索縻]  머리에 굴레를 씌우고 다리에 밧줄 얽어맴. 한유(韓愈)의 시 기최이십육입지(寄崔二十六立之)에 “어떻게 둥지 속에서 방금 부화한 새 새끼에게, 깃털을 꽂아 주어 하늘을 날게 할 수 있으며, 망아지나 사슴 새끼에게 사나운 발톱을 달아 주고, 맹호의 가죽옷을 빌려 주어 입게 할 수가 있는가. 그대의 머리에는 굴레를 씌우고, 그대의 다리에는 밧줄을 얽어매어, 진흙 구덩이 속에 몸을 빠뜨렸으니, 누가 다시 지시하는 말을 받아들이겠는가.[安有巢中鷇 揷翅飛天陲 駒麛著爪牙 猛虎借與皮 汝頭有韁繫 汝脚有索縻 陷身泥溝間 誰復稟指撝]”라고 하였다. <韓昌黎集 卷5>

두유린[杜有隣]  두유린(杜有隣)은 당 숙종(唐肅宗)이 되는 충왕(忠王) 이형(李亨)이 총애하던 희첩(姬妾)인 두양제(杜良娣)의 부친이다. 태자동궁(太子東宮)의 관속인 찬선대부(贊善大夫)를 지냈다. 평소 사위인 좌효위(左驍衛) 병조(兵曹) 유적(柳勣)과 불화하였다. 현종(玄宗) 천보(天寶) 5년(746)에 유적은 두유린이 도참(圖讖)을 망령되게 일컬으며 동궁과 결탁하여 승여(乘輿)를 지척(指斥)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재상(宰相) 이임보(李林甫)는 경조(京兆) 사조(士曹) 길온(吉溫) 등에게 심문을 담당시켜 옥안(獄案)을 확대하여 이옹(李邕)·왕증(王曾) 등을 연루시켰고 결국 장살(杖殺)되었다. 장차 태자 이형에까지 미치려 하자, 화를 입게 될 것을 염려한 태자 이형은 환관 이보국(李輔國)을 파견하여 두양제와의 이혼을 선포하고 폐서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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