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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유변정[竇攸辨鼮], 두율[杜律], 두율우주[杜律虞注], 두융[竇融], 두의[竇儀]


두유변정[竇攸辨鼮]  두유(竇攸)의 정서(鼮鼠)를 분별함. 후한(後漢) 때 광무제(光武帝)가 영대(靈臺)에 연회할 때 표문(豹文)을 띤 쥐를 잡아, 군신들에게 아느냐고 묻자, 아무도 몰랐는데, 두유가 이아(爾雅)에 나오는 정서(鼮鼠 얼룩쥐)라고 하므로, 이아를 상고해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으므로 비단 백 필을 내렸다는 고사이다. <三輔決錄> 정(鼮)은 다람쥐의 일종인 정서(鼮鼠)의 준말로, 쥐와 비슷한 크기에 얼룩무늬가 있으며 깊은 산속의 나무 위에서 서식한다. 한 무제(漢武帝)가 표범 무늬의 쥐 비슷한 동물을 잡고 나서 군신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답변을 못 할 적에 종군(終軍)이 이아(爾雅)의 기록을 인용하며 정서라고 대답하자, 무제가 박학하다고 칭찬하면서 비단 100필을 하사하는 한편 여러 왕자들에게 조칙을 내려 종군에게 이아를 배우게 했다는 고사가 이아의 주(註)에 나와 있다. 또 진(晉)나라 두유(竇攸)도 세조(世祖)의 똑같은 물음에 종군처럼 대답해서 은상(恩賞)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보통 박식한 사람을 비유할 때 정서필대(鼮鼠必對)라는 사자 성어를 쓰곤 한다. <太平御覽 卷215 總敍尙書郞>

두율[杜律]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율시(律詩)를 모은 책이다. 원(元)나라 우집(虞集)이 주석을 붙인 두율우주(杜律虞註)를 가리킨다.

두율우주[杜律虞注]  원대(元代)의 우집(虞集)이 두보(杜甫)의 칠언율시(七言律詩)를 모아 주해를 붙여 만든 책이다.

두율천궁[兜率天宮]  도솔천궁(兜率天宮)이다.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이며 욕계의 정토(淨土)에 있는 천궁으로 지상에서 32만 유순(由旬)의 거리에 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곳에 살면서 석가의 교화를 받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한다고 한다. 도솔천(兜率天)은 욕계육천(欲界六天)의 하나이고, 궁은 거기에 있는 칠보(七寶)의 궁전으로, 한량없는 천인(天人)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도가(道家)에서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있는 하늘이라 일컫는다. 삼계(三界) 가운데 욕계(欲界)·육천(六天)의 한 하늘로. 여기에는 내(內)·외(外)의 두 원(院)이 있으니, 외원(外院)은 하늘의 무리들이 사는 욕락처(欲樂處)이고, 내원(內院)은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사는 곳이라 한다.

두융[竇融]  한(漢)나라 말기 서북 변경의 장수이다. 자(字)는 주공(周公)이다. 왕망(王莽)이 망하자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에게 귀순하여 안풍후(安豊侯)에 봉해졌다. 그 후 벼슬이 대사공(大司空)에 이르렀다. 두융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말기와 후한(後漢) 건국 초기에 하서(河西) 지역에 할거하였던 군벌(軍閥)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에게 하서 지역을 가지고 귀의하여 양주목(涼州牧)에 제수되어 외효(隗囂)를 격파하였다. 이후 건무(建武) 12년(36)에 입조(入朝)하여 대사공(大司空), 장작대장(將作大匠), 행위위사(行衛尉事) 등의 현직(顯職)을 역임하였고, 영평(永平) 3년(60)에는 낙양(洛陽)의 남궁(南宮) 운대각(雲臺閣)에 그의 화상이 그려지는 등 조정에서의 존귀함과 영예가 극에 달하였다. <後漢書 권23 竇融列傳>

두의[竇儀]  북송(北宋) 때 사람으로 학문과 인격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였다. 자는 가상(可象)이다. 후진(後晉)의 진사 출신으로 후주(後周)에서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를 지내고 송(宋)나라에 들어가 공부 상서(工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송(宋) 태조(太祖)가 노성한 선비를 금중(禁中)에 두려 하자, 두의가 추천되었다. 태조가 예부 상서로 승진시켜 정승을 삼으려 했는데 그의 강직함 때문에 조보(趙普)에게 저지되었다. 박학다식하고 전고(典故)에 밝아서 송(宋)나라 태조(太祖)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었다. 주희(朱熹)가 송나라 때 명신의 문집과 전기를 발췌하여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을 엮었는데, 거기에 두의도 실었다. 아들 가운데 다섯 사람이 서로 잇따라서 등과하여 연산두씨오룡(燕山竇氏五龍)이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송 태조가 연호를 건륭(建隆)에서 건덕(乾德)으로 바꿀 때 재상들에게 ‘전대에 사용하지 않았던 연호를 선택하라.’라고 유시하였다. 그런데 건덕 3년(965)에 촉(蜀) 지역을 평정하고 나서 촉의 궁인(宮人)이 가지고 있는 거울의 뒷면에 ‘건덕 4년 주조[乾德四年鑄]’라는 지문(志文)이 있는 것을 보고 재상들에게 그에 대해 질문했는데 모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송 태조가 한림학사인 두의를 불러 물으니 “이는 틀림없이 촉나라의 물건입니다. 촉나라 임금이 이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매우 기뻐하며 “모름지기 독서하는 사람을 정승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고는 유신(儒臣)을 더욱 중시하였다고 한다. <宋史 太祖本紀3> <宋史 卷263 竇儀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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