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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자북정[杜子北征], 두자소기[杜子小技], 두자전광[杜子顚狂], 두자탐가구[杜子耽佳句]


두자북정[杜子北征]  두자(杜子)는 당(唐)나라의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북정(北征)은 두보가 당 숙종(唐肅宗) 지덕(至德) 2년(757) 윤8월에 봉상(鳳翔)의 행재소에서 좌습유(左拾遺)로 있던 중, 말미를 받아 자신의 부모를 비롯한 가족이 있는 부주(鄜州)로 향하는 여정과 집에 도착한 뒤의 상황을 읊은 140구의 오언고시(五言古詩)이다. 이 시의 창작배경은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가 가족들을 부주로 피난시킨 뒤, 숙종이 즉위한 영무(靈武)로 가다가 반란군에 잡혀 장안(長安)으로 압송되었는데, 그 뒤 장안을 탈출하여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숙종이 있던 봉상의 행재소로 가니, 이에 숙종에게 충정을 인정받아 좌습유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 두보는 자신의 부모를 비롯한 가족의 생사가 염려되어 숙종에게 말미를 청하여 부주로 가게 된 것이다. 두보(杜甫)의 시 북정(北征)에 “돌아보니 부끄럽게도 나만 은총 입어, 초라한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 받았네.[顧慙恩私被, 詔許歸蓬蓽.]”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5>

두자우이숙[豆子雨已熟]  두보(杜甫)의 시 별찬상인(別贊上人)에 “찬공은 불문(佛門)의 장로인데도, 경성(京城)에서 쫓겨나 이곳에 왔네. 세속에 얽매임을 면치 못하여, 안색이 자못 초췌한 빛을 띠고 있네. 버들가지가 새벽에 손에 있더니, 콩알이 가을비에 벌써 익었네.[贊公釋門老, 放逐來上國. 還爲世塵嬰, 頗帶憔悴色. 楊枝晨在手, 豆子雨已熟.]”라고 하였다.

두자이숙[豆子已熟]  콩이 익었다는 말은 사귄 지 오래되었음을 뜻한다.

두자소기[杜子小技]  두자(杜子)는 두보(杜甫)이다. 소기(小技)는 문장을 짓는 것은 성인의 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작은 기예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자신의 문장을 낮춰서 표현할 때 조충소기(雕蟲小技)라는 말을 흔히 쓴다. 두보(杜甫)의 시 이화양유소부(貽華陽柳少府)에 두보(杜甫)의 시에서 “문장은 하나의 작은 기예일 뿐, 도에 비교하면 귀할 것이 하나도 없네.[文章一小技, 於道未爲尊.]”라고 하였고, “여생은 눈앞에 스쳐간 새와 같아라, 고향 마을이 이젠 빈 터가 되어 버렸네.[餘生如過鳥, 故里今空村]”라고 하였다.

두자전광[杜子顚狂]  두자(杜子)는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杜甫)의 시 강반독보심화(江畔獨步尋花)에 “강가에 꽃이 피니 산란한 맘 끝없는데, 하소연할 곳 없어서 단지 미칠 것만 같네.[江上被花惱不徹 無處告訴只顚狂]”라고 하였다.

두자진회[杜子秦淮]  두자는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을 가리킨 것으로, 두목의 시 박진회(泊秦淮)에 “연기는 찬 강을 싸고 달빛은 모래톱을 쌌는데, 밤에 진회의 술집 가까운 곳에 배를 대노라니, 장사꾼 아낙은 망국의 한 알지 못하고, 강 저쪽에서 아직도 후정화를 부르고 있네.[煙籠寒水月籠沙, 夜泊秦淮近酒家. 商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라고 하였다.

두자춘[杜子春]  후한(後漢) 때 학자로, 하남(河南) 구지(緱氏) 출신이다. 서한(西漢) 말(末)에 유흠(劉歆)에게 주례(周禮)를 배우고, 주례학(周禮學)의 기초를 닦았다. 태중대부(太中大夫)를 지냈다.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까지 살아 정중(鄭衆)·가규(賈逵) 등이 그에게서 수업하여 주례(周禮)의 학을 전하게 되었다. 이후 그의 주례(周禮) 주석은 정현(鄭玄)의 삼례주해(三禮注解)에 채용되었다. 송나라 때 구지백(緱氏伯)에 봉해졌다.

두자춘전[杜子春傳]  당나라 때의 전기소설로 이복언(李復言)이 편찬한 속현괴록(續玄怪錄)에 실려 있다. 방탕아로 알려진 두자춘이 우연히 한 신선(神仙)을 만나 감화를 받고, 신선이 되려고 수업을 계속하나 좀처럼 속인(俗人)의 애욕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속계로 되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작자의 전기는 미상이나 당나라 중엽 문종 때의 사람인 듯하다.

두자탐가구[杜子耽佳句]  두자(杜子)는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그의 시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서 “나는 성격이 좋은 시구를 몹시 탐내어 시어(詩語)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노라.[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라고 하였다.

두자하[杜子夏]  전한(前漢) 때 두흠(杜欽)으로, 자가 자하(子夏)이고 애꾸였다. 같은 동네의 두업(杜鄴)도 자하라는 자를 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 두흠을 ‘맹인 두자하[盲杜子夏]’라고 불렀다. 두흠이 이를 싫어하여 관(冠)의 폭을 줄이고 높이를 올려 만들어 쓰자, 사람들이 그를 ‘소관두자하(小冠杜子夏)’라고 하고 두업을 ‘대관두자하(大冠杜子夏)’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서(漢書) 60권 두흠전(杜欽傳)에 “의관(衣冠)들이 두흠을 일러 맹두자하(盲杜子夏)라고 하였다.[衣冠謂欽爲盲杜子夏]”라고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注)에 “의관(衣冠)은 사대부를 이른다.[衣冠謂士大夫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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