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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점방맹[杜漸防萌], 두정[蠧政], 두정[杜整], 두정남예[杜征南預], 두정륜[杜正倫]


두점방맹[杜漸防萌]  사물의 싹트는 시초를 막아 후환이 없게 함. 점(漸)은 사물(事物)의 처음을 이르고 맹(萌)은 싹을 이른다. 애당초 싹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뜻으로, 곧 좋지 못한 일의 조짐(兆朕)이 보였을 때 즉시 그 해로운 것을 제거해야 더 큰 해(害)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후한서(後漢書) 정홍전(丁鴻傳)에 보이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동한(東漢)의 장제(章帝)가 죽자, 그의 열 살 된 아들 화제(和帝)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할머니인 두태후(竇太后)가 조정의 일에 참여하게 되고, 외척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두태후는 소금과 철의 전매를 금지하는 명을 내렸으며, 두헌(竇憲)은 지방의 호족들을 장악하는 한편, 사당(私黨)을 조직하여 조정 내부와 각 현(縣)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사당의 조직원들은 백성들의 재물을 수색하여 두현에게 상납하였고, 두현은 이것을 이용하여 많은 자객(刺客)들을 양성·관리들 중 반대하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사도(司徒) 정홍(丁鴻)은 두헌 형제가 반란을 꾀하는 것을 알고, 즉시 화제에게 “만약 폐하께서 직접 정무를 장악하여 신중하게 처리하시고, 병폐의 발생을 미리 막으신다면, 흉악한 일은 없어질 것이고, 행복이 저절로 오게 될 것입니다.[若勅政責躬, 杜漸防萌, 則凶妖鎖減, 害除福溱矣].”라고 상소하여 그들의 세력이 아직 그다지 크지 않을 때 제거하여 후환(後患)을 없애라고 건의하였다. 10여일 후, 화제(和帝)는 정홍을 태위(太尉) 겸 위위(衛尉)에 임명하고 군사대권을 장악하였으며, 두헌의 대장군 직위를 박탈하였다. 그런 후 두헌 형제는 자살하고 말았다.

두정[蠧政]  백성을 약탈하고 착취하는 정치. 나라를 좀먹는 정치. 국정(國政)을 무너뜨림. 한유(韓愈)의 논변염법사의상(論變鹽法事宜狀)에 “소금을 팔아 얻는 이익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을 해치고 국정(國政)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니, 그 폐해가 실로 심할 것입니다.[不知糶鹽所獲幾何. 而害人蠧政. 其弊實甚.]”라고 한 데서 보인다.

두정[頭釘]  대가리가 넓고 둥글게 큰 못. 대가리가 뚱뚱하고 큰 못으로, 대갈못이라고 한다.

두정[頭頂]  두개(頭蓋). 머리꼭지. 머리 꼭대기.

두정[斗庭]  두정(斗庭)은 말[斗] 만큼 작은 협소한 정원을 이른다.

두정[杜整]  수(隋) 나라 때 좌무위장군. 자는 황보(皇甫)이며 두릉인(杜陵人)이다.

두정남[杜征南]  두정남(杜征南)은 진(晉) 나라 때의 경학자(經學者)로 진 무제(晉武帝) 때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에 증직된 두예(杜預)를 이른다. 두예는 몸은 비록 약했으나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으로 있을 때에 오(吳)를 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공을 세운 뒤에는 경적(經籍)을 연구하여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와 춘추장력(春秋長歷)을 지어 뒷날 춘추(春秋)의 이해에 큰 공헌을 하였으므로 춘추(春秋)의 공신이라고들 일컫는다. 진서(晉書) 두예전(杜預傳)에 의하면 “두예(杜預)는 자가 원개(元凱)이며, 관직이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이었는데, 스스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중독된 버릇[左傳癖]이 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두정남예[杜征南預]  정남(征南)은 정남 대장군(征南大將軍)의 약칭. 진(晉) 나라 때 두예(杜預)가 죽은 후에 정남 대장군으로 추증된 까닭에 흔히 두 정남이라 일컬었다.

두정남집[杜征南集]  진 무제(晉武帝) 때의 장군이자 학자인 두예(杜預)의 문집이다. 두예는 자가 원개(元凱)로, 정남대장군에 추봉되었으므로 두정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탐독하여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 춘추석례(春秋釋例) 등의 저술을 남겼다.

두정륜[杜正倫]  당(唐)나라 초기의 재상이다. 상주(相州) 원수(洹水) 사람이다. 수 문제(隋文帝) 때 수재(秀才)로 발탁되었으며 글을 잘 짓고 불경에 조예가 깊었다. 당나라에 들어와 제주총관부녹사참군(齊州總管府錄事參軍)이 되고 진왕부(秦王府) 문학관(文學館)에 들어갔다. 태종 때 위징(魏徵)의 천거로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이 되었으며 이어 급사중(給事中), 중서시랑(中書侍郞),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 등을 역임하고 남양현후(南陽縣侯)에 봉해졌다. 태종 정관 17년에 태자 이승건(李承乾)의 모반에 연루되어 환주(驩州)로 유배되었다. 고종(高宗) 현경(顯慶) 원년에 황문시랑(黃門侍郞),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되어 재상이 되었고, 현경 2년에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현경 3년에 이의부(李義府)와 불화하여 무고를 받고 횡주자사(橫州刺史)로 폄적되었다가 얼마 뒤 그곳에서 병사(病死)하였다.

두정륜[杜正倫]  생몰년 미상. 당(唐) 고종(高宗) 때의 재상이다. 정관(貞觀) 연간에 누차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올랐고, 군국의 정령을 관장하였다. 두정륜(杜正倫)이 미천하였을 때 성남(城南) 두고(杜固)의 대성(大姓)인 두씨(杜氏)들에게 동보(同譜)하기를 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므로 내심 괘씸하게 여기고 있다가 집정(執政)한 뒤에 두고를 파서 수로(水路)를 개통시키자, 냇물이 10일 동안 핏빛으로 변하였고. 그 뒤로는 두고의 두씨들이 점차 미약해져 떨치지 못하였다는 고사가 전호가, 또, 태자(太子) 이승건(李承乾)이 발에 난 병으로 조회에 참여하지 않고 하찮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태종(太宗)이 두정륜에게 “내 아이가 병이 든 것은 그럴 수 있소. 하지만 훌륭하다는 명성이 들리지 않고 사적으로 어울리는 무리들은 대부분 소인들이니 경이 잘 살피도록 하시오. 잘 인도하는데도 듣지 않으면 반드시 내게 보고하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두정륜이 태자에게 자주 간언을 했으나 듣지 않자 태종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승건이 항의의 표문(表文)을 통해 이 사실을 상주(上奏)하자, 태종이 두정륜을 불러 “왜 내 말을 누설했소?”라고 하니, 두정륜이 “개도해도 듣지 않아 폐하의 말씀으로 겁을 주려 했습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노하여 동주자사(同州刺史)로 내보냈다는 고사가 전한다. <唐書 卷70 杜正倫列傳>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1 人倫部 不許通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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