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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주쌍감[斗酒雙柑], 두주장구[斗酒藏久], 두주장리[杜酒張梨], 두주척계[斗酒隻雞]


두주십천[斗酒十千]  한 말[一斗]의 술값이 일만전(一萬錢). 비싼 술이라는 뜻. 일두(一斗)는 현재의 약 2 리터에 이른다. 술 한 말의 값이 만전(萬錢)이나 나가는 좋은 술로, 위(魏)나라의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이 평락관(平樂觀)에서 연회를 베풀 때 이런 술을 썼다고 한다. 이백(李白)의 시 장진주[將進酒]에 “진왕(陳王)이 옛날 평락관(平樂觀)에서 잔치할 때에는, 한 말 술에 만전(萬錢) 주고 실컷 즐기고 농담하였다네.[陳王昔日宴平樂, 斗酒十千恣歡謔.]”라고 하였고, 왕유(王維)의 시 소년행(少年行)에 “신풍의 맛 좋은 술은 한 말에 만 전(錢)인데, 함양의 유협들은 대부분이 소년이로세.[新豊美酒斗十千, 咸陽游俠多少年.]”이라고 하였다.

두주쌍감[斗酒雙柑]  술 한 말과 밀감 두 개.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의 은자인 대옹(戴顒)이 어느 봄날 감귤 두 개와 술 한 말을 싣고 나가기에 어떤 사람이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가서 꾀꼬리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 소리는 속인의 귀를 일깨우고 시심을 고취시켜 주는데, 그대는 그걸 아는가.[往聽黃鸝聲, 此俗耳針砭. 詩腸鼓吹, 汝知之乎.]”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雲仙雜記 卷2> 대옹(戴顒)은 남조(南朝) 송(宋) 나라 사람으로, 자기 형 발(勃)과 함께 동려(桐廬)에 숨어살았는데, 대단한 명망이 있었다. 자기 형이 죽자 동려를 떠나 오하(吳下)에 와 놀았는데 그곳 선비들이 옹을 위해 살 집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宋書 卷93>

두주장구[斗酒藏久]  소식(蘇軾)의 후적벽부(後赤壁賦)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상의했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내가 오래 전부터 한 말의 술을 보관해두고 그대가 불시에 찾을 때를 대비해왔소.’라고 하였다.[歸而謀諸婦 婦曰我有斗酒 藏之久矣 以待子不時之需]”라는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古文眞寶後集 卷8>

두주장리[杜酒張梨]  두강주(杜康酒)와 반악(潘岳)의 한거부(閒居賦)에 보이는 장공대곡지리(張公大谷之梨)를 이른다. 두강(杜康)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술을 만들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술을 보통 두주(杜酒)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리(張梨)는 아주 맛 좋은 배로, 이 배는 천하에 오직 한 그루만 있다고 할 정도로 진귀한 품종이다. 진(晉)나라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장공이 사는 대곡에서 생산되는 배 맛이요, 양나라 후가(侯家)의 감나무인 오비의 맛이로다.[張公大谷之梨 梁侯烏椑之柹]”라는 대목이 나온다.

두주척계[斗酒隻雞]  두주(斗酒)는 한 말의 술. 척계(隻雞)는 닭 한 쪽. 전하여 변변찮은 제사음식을 이른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조조(曹操)가 미미한 신분이었을 때에 교현(橋玄)을 찾아가 문안을 올리자, 교현이 “지금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텐데 생민을 안정시킬 사람은 바로 그대일 것이다.[今天下將亂, 安生民者其在君乎!]”라고 하였는데, 그 뒤 조조가 교현의 무덤을 지나면서 제문을 지어 말하기를 “또 조용히 약속하기를 ‘내가 죽은 뒤 그대가 나의 무덤을 지날 때에 변변찮은 제수로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면 수레를 타고 세 걸음쯤 가다가 복통을 일으키더라도 원망하지 말게.’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우스개로 그냥 하신 말씀이라지만 지친처럼 독실하게 아껴주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말씀을 하였겠습니까.[又承從容約誓之言:徂沒之後, 路有經由, 不以斗酒隻雞過相沃酹, 車過三步, 腹痛勿怨. 雖臨時戲笑之言, 非至親之篤好, 胡肯爲此辭乎?]”라고 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1 橋玄列傳> 또, 소식(蘇軾)의 제조경순묘문(祭刁景純墓文)에 “한 말 술과 닭 한 쪽으로, 이내 슬픔 풀어낼 뿐.[斗酒隻雞, 聊寫我哀.]”라고 하였다. 척계두주(隻鷄斗酒) 혹은 적계서주(炙鷄絮酒)라고도 하는데, 삶은 닭고기 속에 술을 머금은 솜을 넣은 것으로 먼 길을 갈 때 가지고 가기 간편하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서주(絮酒)는 술에 적신 솜을 햇볕에 말렸다가 다시 물에 적셔서 주기(酒氣)가 우러나오게 한 것이라고 한다. 후한(後漢) 때의 명사인 서치(徐穉)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그는 먼 곳에 조문(弔問)하러 갈 때면 늘 솜에 술을 적셔 볕에 말린 다음 그 솜에 구운 닭 한 마리를 싸 가지고 가서, 솜에 물을 적셔 술을 만들고 닭을 앞에 놓고 문상한 뒤에 돌아왔다고 한다. <後漢書 卷53 徐穉列傳>

두주체견[斗酒彘肩]  두주(斗酒)는 말[斗]술을 이르고, 체견(彘肩)은 돼지의 앞다리로 초(楚)나라 항우(項羽)와 한(漢)나라 패공(沛公)이 홍문(鴻門)에서 벌인 잔치에서 패공(沛公)이 위기에 놓이자 번쾌(樊噲)가 뛰어 들어가 이를 질책하였다. 항우(項羽)가 이를 장하게 여겨 두주(斗酒)와 돼지 다리를 하사하니, 번쾌(樊噲)가 두주(斗酒)를 마시고 검을 뽑아 돼지 다리를 썰어서 호쾌하게 먹었다. 이후로 두주체견(斗酒彘肩)은 호쾌한 장부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두주학사[斗酒學士]  당(唐)나라 왕적(王績)이 문하성 대조(門下省待詔)로 있을 때 관(官)에서 으레 매일 술 3되를 주었는데, 그에게는 1말을 주자 당시 사람들이 두주학사(斗酒學士)라 불렀다고 한다. 왕적(王績)이 술을 좋아하여 자신의 벼슬살이는 매일 지급해 주는 술 세 되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씨어림(何氏語林)> 그는 하수(河水) 가에 밭 16경(頃)을 가지고서 노비들에게 기장을 심게 하여 봄가을로 술을 빚게 하고, 오리와 기러기를 기르고 약초(藥草)를 심어 생활하였으며, 중장자광(仲長子光)이라는 은자(隱者)와 함께 복식법(服食法)으로 본성을 길렀으며, 형제(兄弟)가 보고 싶으면 즉시 하수를 건너서 집에 돌아가곤 하였다. 북산 동고(北山東皐)에 노닐면서 스스로 동고자(東皐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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