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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죽맥반[豆粥麥飯], 두중각경[頭重脚輕], 두중위[杜重威], 두증[痘證], 두지일환[杜摯一丸]


두죽[豆粥]  후한 광무제가 초야에 노숙하며 요양(饒陽) 무루정(無蔞亭)에 이르렀을 때 날이 몹시 추웠는데, 풍이(馮異)가 콩죽을 올렸다. 이튿날 아침에 광무제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어제 공손의 콩죽을 먹고서 굶주림과 추위가 모두 풀렸다.[昨得公孫豆粥, 飢寒俱解.]”라고 하였다. 공손은 풍이의 자(字)이다. <後漢書 卷17 馮異列傳>

두죽맥반[豆粥麥飯]  콩죽과 보리밥.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가 칭제(稱帝)하기 전에 일찍이 계주(薊州) 동남쪽으로부터 요양(饒陽)의 무루정(無蔞亭)에 이르렀을 때 군중(軍衆)이 모두 굶주리고 지쳤는데, 이때 풍이(馮異)가 팥죽을 올렸고, 행차가 남궁(南宮)에 이르렀을 때는 큰비바람을 만났는데, 이때는 풍이가 보리밥을 올려 이것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호타하(滹沱河)를 건너 신도(信都)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뒤에 광무제가 제위에 오르고 나서 풍이에게 진보(珍寶), 의복(衣服), 전백(錢帛) 등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창졸간에 마련해 준 무루정의 팥죽과 호타하의 보리밥이 몹시 고마웠는데, 그런 후의를 오래도록 갚지 못하였다.[倉卒蕪蔞亭豆粥, 滹沱河麥飯, 厚意久不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17 馮異列傳>

두준[杜濬]  명말(明末)의 학자로서 명이 망하자 금릉산(金陵山)에 은거하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저서로는 변아당집(變雅堂集)이 있다.

두중각경[頭重脚輕]  머리가 무겁고 다리에 힘이 빠짐. 정신(精神)이 어찔하여 쓰러짐.

두중위[杜重威]  오대(五代) 때 삭주(朔州) 사람으로 후당(後唐) 명종(明宗)을 섬겨 방주자사(防州刺史)가 되었으며, 석경당(石敬瑭)이 후진(後晉)을 건국하자 금군(禁軍)을 맡고 노주절도사(潞州節度使)에 올랐으며 석경당의 누이와 혼인하였다. 출제(出帝) 개운(開運) 3년(946) 군대 10만 명을 이끌고 거란(契丹)에 항복하면서 석경당이 했던 방식대로 거란의 도움을 받아 황제가 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업(鄴)으로 돌아왔다. 유지원(劉知遠)이 후한(後漢)을 세우고 공격하자 항복하여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후한(後漢) 고조(高祖) 유지원(劉知遠)은 후한(後漢)을 건국한 지 1년 만에 병사(病死)하였다. 두중위(杜重威)는 비록 후한에 투항하였으나 고조는 그를 믿지 않았고, 병사할 때 두중위를 잘 방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조가 죽은 후 후한의 대신들이 그와 그의 아들들을 체포하여 주살하였다.

두증[痘證]  천연두(天然痘). 천연두[痘疫두역]의 증세. 열이 심하고 온몸에 붉은 반점이 나타나며 심하면 콩알만큼씩 곪아서 얽은 자국이 생긴다. 포창(疱瘡)으로 인한 부스럼과 종기 때문에 별성(別星), 별성마마(別星媽媽), 호구별성(戶口別星)이라고도 한다.

두지[杜摯]  진(秦)나라 장수 왕계(王稽)의 부장(副將)이다. 상군서(商君書) 경법(更法)에 “두지가 말하기를 ‘신은 들으니, 백 번 이롭지 않으면 법을 바꾸지 않으며, 십분 공이 없다면 기물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들으니, 옛것을 본받으면 허물이 없고, 예를 따르면 사특함이 없다고 하니, 임금께서는 도모하십시오.’라고 하였다.[杜摯曰 :臣聞之, 利不百, 不變法; 功不十, 不易器. 臣聞法古無過, 循禮無邪, 君其圖之.]”라고 보인다.

두지일환[杜摯一丸]  두지(杜摯)의 한 환약. 두지(杜摯)는 삼국 시대 때에 위(魏)나라에서 벼슬한 사람으로, 교서(校書)에 보임된 채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동향 사람인 관구 검(毌丘儉)이 조신(朝臣)이 되자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시 한 수와 함께 선약(仙藥) 한 환(丸)을 구해 보낸 일이 있다. <文章叙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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