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참대폄[竇參代貶] 두참(竇參)이 대신 당직을 서고 대신 폄적(貶謫)됨. 두참(竇參)은 당 덕종(唐德宗) 때의 재상이다. 만년위(萬年尉)로 있을 때, 당일 숙직을 서야 하는 동료가 부모님께서 아프다는 말을 듣고 당황해하자 대신 서 주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감옥에 있던 죄수가 도망을 가서 경조윤(京兆尹)이 당직 장부에 따라 동료를 탄핵하자, 두참은 상황이 급하여 미리 휴가 신청을 하지 못하고 집에 가서 자신이 대신 섰던 것이니 자신이 벌을 받겠다고 하여 마침내 강하위(江夏尉)로 폄적(貶謫)되었다. <新唐書 卷145 竇參列傳>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29 仕進部 同官 同列代貶>
두참필백[竇參匹帛] 두참(竇參)은 당 덕종(唐德宗) 때 재상을 지낸 인물인데, 재물에 대한 탐욕이 극심하여 집에 비단을 가득 쌓아 두었다고 한다. <新唐書 竇參列傳>
두창[痘瘡] 마마. 천연두(天然痘)를 말한다.
두창[頭瘡] 양(陽)이 성한 머리에 열이 많아 부스럼이 생기는 병증. 외감이나 내상으로 올 수 있다. 소아에게 흔하다.
두채공[杜蔡公] 두여회(杜如晦)를 가리킨다. 중국 당(唐)나라 초기의 현신(賢臣)이다. 대대로 북조(北朝)와 수(隋)나라에서 벼슬하던 관료 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가 관중(關中)으로 들어오자 이세민(李世民)의 참모로 정벌에 나서 공을 세웠으며, 이세민이 태자가 되자 좌서자(左庶子)가 되었다가 병부 상서로 승진하고 채국공(蔡國公)에 봉해졌다. 후에 이부 상서를 겸직하고 우복야에 올라 관리 선발을 전담하면서 적임자라는 평을 들었다. 당나라의 법률제도와 인사행정을 정비하여 방현령과 더불어 정관(貞觀)의 치(治)를 구축하였으며, 방현령이 계획을 하면 두여회가 이를 과단성 있게 집행한다 하여 ‘방모두단(房謀杜斷)’이라는 말이 나왔다. 시호는 성(成)이다.
두처사전[杜處士傳] 소식(蘇軾)이 두충을 의인화하여 지은 두처사전(杜處士傳)이 있는데, 그 첫머리가 “두중은 욱리 사람이니, 천품이 후박하고 원대한 뜻이 있었다.[杜仲 郁里人也 天資厚朴 而有遠志]”라는 말로 시작된다. <東坡全集 卷39>
두척산[斗尺山]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무학산(舞鶴山)을 말한다. 봉우리에 고운대(孤雲臺)가 있고, 남쪽으로 5리 지점에 월영대(月影臺)가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노닐던 곳이다.
두천[斗千] 두십천(斗十千)의 준말인데, 십 천은 곧 일만 전(一萬錢)으로, 미주(美酒) 일두(一斗)에 돈이 일만 전이나 됨을 이른 말이다. 왕유(王維)의 시 소년행(少年行)에 “신풍의 맛 좋은 술은 한 말에 십천인데, 함양의 유협들은 대부분이 소년이로세. 서로 만나 의기로 그대 위해 술 마시니, 높은 누각 수양버들 가에 말 매어 놓았네.[新豊美酒斗十千, 咸陽游俠多少年. 相逢意氣爲君飮, 繫馬高樓垂柳邊.]”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십천(十千)은 천의 열 배, 즉 만을(萬) 뜻한다. 당시의 말[斗]은 약 2리터였다.
두천하지구 비사직지복[杜天下之口 非社稷之福]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아 언로를 개방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님을 이른다. 통감절요(通鑑節要) 당기(唐紀) 헌종 2년(憲宗二年)에 “군주가 부지런히 간언하기를 바라도 오히려 간언이 이르지 않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간관에게 죄를 준단 말입니까? 이렇게 하면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을 것이니, 사직(社稷)의 복이 아닙니다.[人主孜孜求諫, 猶懼不至, 況罪之乎. 如此, 杜天下之口, 非社稷之福也.]”라고 한 데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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