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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한[杜韓], 두한족열[頭寒足熱], 두함[頭銜], 두행[杜倖], 두향[頭香], 두헌[竇憲]


두하[杜荷]  두하(杜荷)는 두여회(杜如晦)의 아들로 성양공주(城陽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태종(太宗) 정관(貞觀) 연간에 태자 이승건(李承乾)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가 주벌당하였다.

두한[杜韓]  두한(杜韓)은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병칭이다. 두보와 한유는 북송(北宋) 시대 이래 높이 추앙되었다. 북송의 소철(蘇轍)은 “당나라의 시로는 마땅히 한유와 두보를 따라야 하니, 한유의 시는 호방하고 두보의 시는 장엄하다.[唐人詩當推韓杜, 韓詩豪, 杜詩雄.]”라고 하였다. <歲寒堂詩話 卷上>

두한시[杜韓詩]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시를 이른다.

두한족열[頭寒足熱]  머리는 차게 두고 발은 따듯하게 하는 것. 예부터 전해지는 건강법이다.

두함[頭銜]  직함(職銜)의 첫머리. 관함(官銜)의 별칭. 관리(官史)의 위계(位階)를 적은 관함(官銜)을 이름. 참고로, 송(宋)나라 때 종정(宗正)은 품계는 공경(公卿)의 반열에 해당되지만 직함은 산직(散職)을 맡아 사람들이 그를 두고 냉경(冷卿)이라 부르며 희롱하였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시 용구운송노원한지명주(用舊韻送魯元翰知洺州)에 “도관이 아무리 즐겁다 하지만, 냉경이 응당 다시 따뜻하리라.[道館雖云樂, 冷卿當復溫.]”라고 하였다. <東坡全集 卷16 用舊韻送魯元翰知洺州>

두행[杜倖]  아첨하는 사람을 막음. 요행을 바라는 것을 막음.

두향[頭香]  옹두향(甕頭香)으로, 독에서 나오는 술 향내를 말한다.

두헌[竇憲]  동한 시대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度)이다. 후한 장제(後漢章帝)의 황후 두 태후(竇太后)의 오빠로, 장제가 죽은 뒤에 두 태후가 정치를 하게 되자, 시중(侍中)으로 권세를 잡았다. 시중에 이르러서는 갖은 전횡을 저질러도 아무도 그 위세를 제어하지 못했다. 심지어 심수 공주(沁水公主)의 정원을 헐값에 강탈했는데, 공주도 그 위세가 두려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후에 장제에게 발각되었으나 장제 또한 가벼운 견책을 내릴 뿐이었다고 한다.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어 흉노(匈奴) 북선우(北單于)를 격파하고 그 비(碑)를 연연산(燕然山)에 세우고 개선하였다.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세력을 부리게 되매, 두씨(竇氏)의 일족이 조정에 가득 차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황제까지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장제(章帝)가 정중(鄭衆)과 밀의(密議)하여, 그 인신(印信)을 박탈하고 자살(自殺)하게 하였으며 일족이 멸망하였다. <後漢書 卷23 竇憲列傳>

두헌반고[竇憲班固]  후한(後漢) 안제(後漢安帝) 영초(永初) 초기에 대장군(大將軍) 두헌(竇憲)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했을 때 반고(班固)는 중호군(中護軍)이 되어 종군(從軍)했다가 두헌이 패하게 되자 같이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일찍이 낙양령(洛陽令) 충긍(种兢)이 반고의 종에게 수모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두헌이 두려워 어찌하지 못하다가 두헌이 죄를 당하게 되자 반고를 얽어넣었으므로 반고는 옥중에서 죽으니 나이가 61세였다. 그 후 안제는 반고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충긍을 견책(譴責)했다. <後漢書 卷40下 班彪列傳>

두헌반고[竇憲班固]  후한(後漢) 화제(後漢和帝) 영원(永元) 1년(89)에 거기 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북선우(北單于)와 계락산(稽落山)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흉노의 영역인 제해(鞮海)에까지 추격하여 1만 3천 명의 수급과 가축 1백만 마리를 노획하고 선우족 20여 만 명의 항복을 받은 뒤에 중국의 변새(邊塞)에서 북쪽으로 3천 리 떨어진 연연산(燕然山)에 올라가 그때의 전공을 돌에 새겼는데, 이때 중호군(中護軍)으로 정벌군을 따라간 반고(班固)가 비명(碑銘)을 지었다. <후한서(後漢書) 권23 보헌전(寶憲傳)>

두헌주정중용[竇憲誅鄭衆用]  화제(和帝)가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외척 두헌(竇憲) 형제가 정권을 장악하여 신하들이 황제를 직접 만나지 못하게 했다. 이에 화제는 궁중에서 오직 환관들만 만날 수 있었으므로 환관 정중(鄭衆)을 등용하여 두헌 일파를 제거하였다. 환관이 권세를 부려 한나라가 망함에 이른 것은 바로 이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史略 卷3 東漢>

두헌형제[竇憲兄弟]  후한서(後漢書)의 황후기(皇后紀), 두헌전(竇憲傳), 원안전(袁安傳) 등에 의하면 “두태후(竇太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한 뒤에 그의 오빠 두헌(竇憲)은 시중(侍中), 동생 두경(竇景)은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두경(竇景)과 두배(竇环)는 중상시(中常侍)가 되었다. 형제들이 모두 요직에 있었으므로 교만 방종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제상왕자(齊殤王子) 도향후(都鄕侯) 유창(劉暢)이 국상(國喪)에 조문하러 와서 두태후(竇太后)에게 총애를 받으니, 두헌(竇憲)은 유창(劉暢)이 총애받은 것을 시기하여 자객(刺客)을 보내 유창(劉暢)을 둔위(屯衛) 속에서 살해하였다. 뒤에 일이 발각되자, 두태후(竇太后)가 노하여 두헌(竇憲)을 내궁(內宮)에 가두었다. 두헌(竇憲)은 주살(誅殺)될까 겁이 나서 흉노(匈奴)를 쳐서 속사(贖死)할 것을 자청하고 북선우(北單于)와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두헌(竇憲)은 그 전공(戰功)을 뽐내며 북노(北虜)와 친의를 다질 생각으로 좌록여왕(左鹿蠡王) 아동(阿佟)을 북선우(北單于)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때 사도(司徒) 원안(袁安)과 사공(司空) 임외(任隗)는 정의를 지키고 있었는데, 연달아 상소하여 그 일을 저지하였다. 심지어 조당(朝堂)에서 갓을 벗은 채로 간쟁(諫諍)하기까지 하였으나 두태후(竇太后)가 듣지 않아 결국 북선우(北單于)를 세우게 되었다. 뒤에 두헌(竇憲) 등이 황제(皇帝)의 살해를 도모하였는데, 화제(和帝)는 몰래 그 음모를 알고는 환관(宦官) 정중(鄭衆) 등과 그들을 주살(誅殺)할 것을 숙의하여 두헌(竇憲) 형제를 모두 압박하여 자살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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