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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화우[豆花雨], 두환[痘患], 두회기렴[頭會箕斂], 두회정[竇懷貞], 두후침비[杜侯沉碑]


두화[豆花]  두창에서 반점이 돋아나 피어나는 것을 이른다.

두화우[豆花雨]  콩꽃이 필 무렵에 내리는 비로, 음력 8월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두환[痘患]  마마병. 천연두(天然痘)를 앓음.

두환경행[杜環經行]  두환(杜環)의 경행(經行). 두환(杜環)은 통전(通典)의 저자 두우(杜佑)의 일족으로, 751년 탈라스강 전투에서 당군(唐軍)이 대패하여 사라센군의 포로가 되었다. 762년 석방되자 바닷길로 귀국하여,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경행기(經行記)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아바스왕조의 초기의 서아시아에 대한 사정을 전하는 귀중한 문헌이지만, 산일(散逸)하여 통전(通典) 이하의 여러 서적에 그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두황상[杜黄裳]  당(唐)나라 덕종(德宗)·순종(順宗)·헌종(憲宗) 때의 명신(名臣)으로, 당(唐) 두릉인(杜陵人)이다. 자는 준소(遵素), 시호는 선헌(宣獻)이다. 헌종(憲宗)의 장인으로, 법도를 정리하고 번진(藩鎭)을 줄여 당나라의 중흥을 이루는 데 공을 세웠다. 벼슬은 문하시랑(門下侍郞)·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하중진강절도사(河中晉絳節度使)를 지냈다. 순종이 중풍을 앓아 벙어리가 되어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자, 순종 즉위년(805) 7월에 사위인 재상(宰相) 위집의(韋執誼)를 권하여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황태자(皇太子)가 정무를 대신 처리할 것을 청하도록 하였다. 곽자의의 삭방 종사관이 되었으며, 곽자의가 조정에 들어갈 때 두황상을 남겨 두어 삭방을 다스리게 했다. 빈장(邠將) 이회광(李懷光)이 감군과 음모를 짜서 조서를 위조하여 대장군 온유아(溫儒雅) 등을 죽이려 했으나 그것이 허위 사실임을 밝혔다. 유벽(劉闢)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모든 사람이 진압이 불가하다고 하였지만 오직 두황상이 토벌을 청하여 헌종이 윤허하자, 고숭문(高崇文)을 고무시켜 난을 평정하였다. 유벽의 난이 평정되자 축하 자리에서 헌종이 두황상에게 눈길을 주면서 “이는 경의 공로이다.”라고 하였다. <新唐書 卷169 杜黃裳列傳>

두회[荳灰]  눈발을 말한다.

두회[頭會]  사람의 머릿수를 헤아려서 세금을 거두는 것을 말한다. 곧 가혹하게 세금을 거둠을 이른다.

두회기렴[頭會箕斂]  세금을 가혹하게 매김. 세금을 수탈함. 두회(頭會)는 인원수를 조사하여 조세를 받는 일. 기렴(箕斂)은 삼태기로 물건을 끌어 담듯이 많은 것을 탐하는 일. 두회기렴(頭會箕斂)은 사람 머리수에 따라 곡식을 내게 하여 삼태기로 쓸어 담듯 거두어들인다는 말로, 부세(賦稅)가 과중함을 이른다. 사기(史記) 권89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에 “안과 밖이 소란스러워 백성들이 피폐하였는데도, 두회기렴하여 군비를 조달하였다.[外內騷動 百姓罷敝 頭會箕斂 以供軍費]”라고 하였고, 한서(漢書) 진여전(陳餘傳)에 “두회기렴하여 군비(軍備)를 장만하므로 재력이 고갈되었다.[頭會箕斂, 以供軍費, 財匱力盡.]”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관리가 그 집에 당도하여 인두(人頭)로 헤아려 곡식을 내게 해서 삼태기로 쓸어 담듯 거두어 간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두회정[竇懷貞]  두회정(竇懷貞)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신하로, 태평공주(太平公主)와 결탁하여 현종을 시해하려다가 죽임을 당하고 독씨(毒氏)가 되었다. <古今姓氏書辯證 권36>

두후[竇后]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비(妃). 한나라 관진(觀津) 출신. 문제의 후(后). 여태후(呂太后) 때 양가(良家)의 아들을 데리고 궁에 들어왔다. 태후는 그녀를 대왕(代王: 나중에 문제)에게 내려 경제(景帝)를 낳았다.

두후[杜侯]  두예(杜預)를 가리킨다. 진(晉)나라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원개(元凱), 시호는 성(成)이다. 하남 윤(河南尹)과 탁지상서(度支尙書)의 벼슬을 하였다.

두후[杜后]  진 강제(晉康帝)의 형 성제(成帝)의 황후이다.

두후침비[杜侯沉碑]  두후는 두예(杜預)를 가리킨다. 진서(晉書) 권34 두예전(杜預傳)에 “두예는 후세에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여 항상 말하기를 ‘높은 언덕은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이 되기까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돌을 깎아서 두 개의 비석을 만들고 그 훈적(勳績)을 썼는데, 하나는 만산(萬山) 아래에 묻고 하나는 현산(峴山) 위에 세우면서 ‘어찌 이후에 언덕과 골짜기가 되지 않을 줄 알리오?’라고 하였다.[杜預好後世名. 常言: ‘高岸爲穀, 深穀爲陵.’ 刻石爲二碑記其勳績, 一沉萬山之下, 一立峴山之上曰: ‘焉知此後不爲陵穀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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