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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흑[頭黑], 두흠[杜欽], 두흠곡영[杜欽谷永], 두흠왕봉[杜欽王鳳], 두힐[豆肹]


두흑[頭黑]  머리가 아직 검은 젊은 시절을 이른다.

두흠[杜欽]  한(漢)나라 때의 유학자이다. 자는 자하(子夏)로 두연년(杜延年)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경서를 좋아하여 재능으로 경사(京師)에 알려졌으나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관리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왕봉(王鳳)이 자신을 도와줄 인재를 구할 때 왕봉의 아버지 왕금(王禁)이 두흠의 형인 두완(杜緩)과 교분이 있어 두흠이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추천하여 무고령(武庫令)으로 삼았다. 왕장이 죽은 뒤 사람들이 왕봉을 비난하자 왕봉을 두둔하여, 왕장이 실은 죄가 있어 죽은 것인데도 천하 사람들이 이를 모르고 그가 말한 것 때문에 죽었다고 비난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봉을 위해 계책을 내어, 왕장의 일로 직간한 사람을 천거하고 현직 근위(近衛) 낭관(郎官)과 왕봉의 속관(屬官)들로 하여금 직언을 하도록 함으로써 왕봉이 상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님을 밝히도록 하였다. 수를 모두 누리고 죽었다. <資治通鑑 卷30 成帝 上之上 陽朔 元年> 백호전(白虎殿)은 석거각(石渠閣)과 함께 한대(漢代)의 문신(文臣)이 모여 경전을 강론하던 곳이다. 한 성제(漢成帝)가 백호전에서 직언(直言)의 선비를 뽑을 때 두흠(杜欽)이 천하 만물을 공평히 사랑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임을 논하여 대책을 올렸다. <歷代名臣奏議 卷23 治道>

두흠곡영[杜欽谷永]  말은 그럴듯하게 잘하는데 신실성이 부족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한 성제(漢成帝) 당시 시책(時策)을 물었을 때 대책을 올린 수십 인 가운데 두흠(杜欽)과 곡영(谷永)이 일등으로 뽑혔는데, 곡영 역시 왕봉(王鳳)을 섬기다가 그가 죽자 왕담(王譚)을 추종하였고 그 뒤에는 왕담의 경쟁자였던 왕음(王音)에게 빌붙는 등 왕씨(王氏)의 세객 역할을 하였다. <漢書 卷85>

두흠왕봉[杜欽王鳳]  한 성제(漢成帝) 때 두흠(杜欽)은 외척으로서 실권자였던 대장군 왕봉(王鳳)의 막하로 들어간 이후, 여색과 천재지변 및 황제의 물음에 곡진하게 간언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주로 왕봉의 신변을 보호할 목적으로 일종의 세객(說客) 역할을 담당하여, 결과적으로 왕봉의 전횡을 강력히 탄핵하여 성공 일보 직전까지 밀고 갔던 경조윤(京兆尹) 왕장(王章)을 조옥(詔獄)에서 죽게까지 하였다. <漢書 卷36>

두힐[豆肹]  전라도 나주목(羅州牧) 회진폐현(會津廢縣)의 백제(百濟) 시대 이름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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