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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사유하[得死牖下], 득상응[得霜鷹], 득상일치[得喪一致], 득성죽어흉중[得成竹於胸中]


득사[得似]  득사(得似)는 재능이 ~만한 사람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득사부달의[得辭不達意]  정이(程頤) 역전(易傳) 서(序)에 “말만 이해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만,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得于辭不達其意者有矣, 未有不得于辭而能通其意者也.]”라고 하였다.

득사유하[得死牖下]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적침(適寢)의 방에서 죽으면 시신을 염금(斂衾)으로 덮는다.[死于適室 幠用斂衾]”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 “앓을 때에는 방의 북쪽 벽 아래에 처하고 죽은 뒤에는 창 아래로 옮긴다.[疾時處北庸下, 死而遷之當牖下.]”라고 하였다. 뒤에 유하(牖下)는 임종하는 정침(正寢)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천수를 누리고 죽은 것을 말한다.

득상[得喪]  얻은 것과 잃은 것. 득실(得失). 명리(名利), 즉 명성이나 이익을 얻거나 잃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잃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기도 한다.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무릇 천하는 만물이 공동으로 생식하는 곳입니다. 공동으로 생식하는 기운을 얻어 하나가 될 수 있은 즉, 우리의 사지와 몸의 각 부위도 장차 먼지가 되고 생사와 시종도 밤낮이 바뀌면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과 같을 것인데, 어떻게 득실이나 화복에 한계나 경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夫天下也者, 萬物之所一也. 得其所一而同焉, 則四肢百體將爲塵垢, 而死生終始將爲晝夜, 而莫之能滑, 而况得喪禍福之所介乎.]”라고 하였다.

득상응[得霜鷹]  서리가 앉은 매. 조야첨재(朝野僉載)에 의하면, 소미도(蘇味道)는 재식(才識)이 뛰어나서 물망(物望)이 높았고, 왕방경(王方慶)은 비루(鄙陋)한 체질(體質)과 노둔(魯鈍)한 언사(言詞)에 재지(才智) 또한 범용(凡庸)했는데도 소미도와 왕방경이 똑같이 봉각 시랑(鳳閣侍郞)이 되었으므로, 혹자가 장원일(張元一)에게 묻기를 “소미도와 왕방경이 누가 더 나은가?” 하자, 장원일이 대답하기를 “소미도는 구월에 서리를 얻은 매와 같고, 왕방경은 시월에 얼어붙은 파리와 같다.[蘇九月得霜鷹 王十月被凍蠅]”라고 하였다는 데서 온 말로, 서리를 얻은 매란 곧 재주가 준걸(俊傑)한 사람을 비유한다.

득상일치[得喪一致]  얻으나 잃으나 매한가지임. 당 목종(唐穆宗) 때 전휘(錢徽)가 시관(試官)이 되자, 재상 단문창(段文昌)과 한림학사 이신(李紳)이 각각 거자(擧子)를 천거하는 글을 보내면서 급제시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낙제하자 목종에게 참소하여 전휘는 강주 자사(江州刺史)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이종민(李宗閔) 등이 전휘에게 단문창과 이신이 보낸 편지 내용을 아뢰면 황제가 깨달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전휘는 “그렇지 않다. 만약 마음속으로 부끄러울 일이 없다면 벼슬을 얻으나 잃으나 매한가지이다. 몸을 닦고 행실을 조심하면 될 것이니, 어찌 개인적인 편지를 증거로 제시할 수 있겠는가.[不然 苟無愧心 得喪一致 修身愼行 安可以私書相證耶]”라 하고는 자제에게 그 편지를 불사르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168 錢徽傳>

득상종인[得賞從人]  상을 탈 자격을 지닌 수행원을 이른다.

득선[得仙]  신선을 만나다. 신선이 되다.

득성[得姓]  자손을 둠을 이른다. 성(姓)은 자성(子姓)으로, 자손과 같은 뜻이다.

득성어위[得姓於衛]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손씨(孫氏)는 위 무공(衛武公) 후손이다. 무공(武公) 화(和)가 공자(公子) 혜손(惠孫)을 낳았고, 혜손(惠孫)이 이(耳)를 낳았으며, 위(衛)의 상경(上卿)이 되어 척(戚)을 식읍으로 받았다. 무중(武仲)을 낳았는데, 또한 손중(孫仲)이라고도 불렀으니, 조부(祖父)의 자(字)로써 씨(氏)를 삼았기 때문이었다.[孫 衛武公之後也 武公和生公子惠孫 惠孫生耳 以爲上卿 食邑于戚 生武仲 亦曰孫仲 以王父字爲氏]”라고 한 말을 근거로 한 것으로, 위(衛)나라 공자(公子) 혜손(惠孫)의 자(字)인 손(孫)을 성씨(姓氏)로 삼았다는 것이다.

득성죽어흉중[得成竹於胸中]  미리 마음속에 계획을 그려 둠의 비유. 성죽은 그림으로서 완성된 대나무, 대나무를 그릴 때 마디나 잎등의 자질구레한 데에 얽매여 있으면 대나무 전체의 모습을 잃게 되므로, 먼저 완성된 대나무의 모습을 마음속에 떠 올리고, 그리고 나서 붓을 든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소식(蘇軾)의 문여가화운당곡언죽기(文與可畫篔簹谷偃竹記)에 “대나무를 그릴 적에는 반드시 먼저 가슴속에서 완전한 대나무를 구상해놓은 다음, 붓을 잡고 익숙히 보다가 마침내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를 보면(구상하면) 급히 일어나 뒤따라 그려서, 붓을 휘둘러 곧바로 구상한 바를 따라 그리되, 마치 토끼가 놀라 일어나고 새매가 토끼를 잡기 위해 내려앉듯이 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느슨히 하면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畫竹必先得成竹於胷中, 執筆熟視, 乃見其所欲畵者, 急起從之, 振筆直遂, 以追其所見, 如兎起鶻落, 少縱則逝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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