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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공가성[滕公佳城], 등공거실[滕公居室], 등공견일[滕公見日], 등공기구추[滕公起廐騶]


등공[滕珙]  주희(朱熹) 문하의 뛰어난 제자이다. 자는 덕장(德章), 호는 몽재(蒙齋)이다. 저서로 경제문형(經濟文衡)이 있다. <宋元學案 卷69>

등공[滕公]  등공(滕公)은 한(漢)나라의 개국공신인 하후영(夏侯嬰)의 봉호이다. 등공이 하루는 말을 타고 동도문(東都門)에 이르렀는데, 말이 가지 않고 발로 땅을 헤집기에 그곳을 파 보니 석곽(石槨) 하나가 나왔는데, 여기에 “답답하던 가성이 3천 년 만에 태양을 보네. 아, 등공이 이곳에 머물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등공이 유언을 남겨, 자신이 죽은 뒤에 이곳에 장사 지내게 한 고사가 있다. <西京雜記 卷4>

등공가성[滕公佳城]  가성(佳城)은 무덤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등공(滕公) 하후영(夏侯嬰)이 일찍이 수레를 타고 가다가 동도문(東都門) 밖에 이르렀는데, 말이 울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발로 땅을 구르는 것이었다. 이에 등공이 사졸(士卒)을 시켜 그 자리를 파보도록 하여 석 자 깊이 땅속에서 석곽(石槨)을 발견하였는데, 거기에 “가성이 울울하니, 삼천 년 만에야 해를 보도다. 아! 등공이여, 이 실에 거처하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등공은 자신이 죽으면 이곳에다 장사 지내게 하여 죽은 뒤 마침내 이곳에 묻혔다는 등공가성(滕公佳城)의 고사가 전하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西京雜記 卷4>

등공가성[滕公佳城]  등공(滕公)공은 한나라 고조 때의 명신인 하후영(夏侯嬰)의 봉호이다. 박물지(博物志) 이문(異聞)에 “등공이 죽자 동도문(東都門) 밖에서 장례 지내려고 공경들이 장례 행렬을 배웅했는데, 말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발로 땅을 구르며 슬피 울었다. 이에 땅 구른 곳을 파보니, 다음과 같은 명문이 나왔다. ‘가성(佳城)이 아름다우니, 3천 년 만에 해를 보도다. 아! 등공이여, 이 방에 거하라.’ 이에 그곳에 등공을 묻었다.[漢滕公薨 求葬東都門外 公卿送喪 駟馬不行 踣地悲鳴 踣蹄下地 得石有銘 曰 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 滕公居此室 遂葬焉]”라고 하였다.

등공거실[滕公居室]  등공(謄公)은 한(漢) 나라 때 하후영(夏侯嬰)의 봉호(封號)이다. 하후영이 어느 날 수레를 타고 장안(長安)의 동쪽 성문 밖에 나갔을 때 말이 울며 발로 땅을 파헤쳤다. 등공이 군졸들을 시켜 말이 판 곳을 파게 하여 세 자쯤 팠을 때 석곽(石郭)이 나왔는데 그 석곽에, “가성이 울울하니, 삼천 년 만에야 해를 보도다. 아아! 등공이여, 이 실에 거처하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 居此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등공이 말하기를 “아, 하늘이 지정한 것이니 내가 죽으면 이곳에 안장하도록 해야겠다.”고 하였다 한다. <西京雜記> <西京雜記 卷4>

등공견일[滕公見日]  중국 한나라 등공이 죽었을 때, 동도문(東都門) 밖에 장지를 구하여 공경(公卿)이 상여를 보낼 즈음 말이 나가지 않고 슬피 울면서 엎드렸는데, 그 자리에서 “가성이 울울하니, 3천 년 뒤에나 밝은 해를 보리라. 아, 등공이 이곳에 묻히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고 새겨진 돌을 구하여 드디어 여기에 장사 지냈다는 고사가 있다. <博物志 異聞>

등공기구추[滕公起廐騶]  등공(滕公)은 한(漢)의 하후영(夏侯嬰)을 말한다. 하후영은 패(沛)땅 사람으로 처음에 패에서 말을 관리하는 천역(賤役)을 하던 자였는데, 유방(劉邦)과 사이가 좋았던 관계로 뒤에 유방이 한 나라를 세우고 천자(天子)가 되자 하후영은 태복(太僕)이 되었으며 한 나라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漢書 卷四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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