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롱[燈籠] 새장처럼 생긴 등. 대나무 또는 나무나 쇠 같은 것의 살로 둥근 바구니 모양의 골조를 만들고, 거기에 비단 또는 종이를 씌워 그 속에 등잔을 넣는 것이다. 손잡이가 있어 들고 다니거나 걸어 두었다.
등롱[燈籠] 쇠나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겉에 종이나 깁을 발라 그 속에 등불을 켜고 매달았는데, 정월 보름날 행하는 풍속이다.
등롱금[燈籠錦] 등롱금은 중국 촉(蜀) 지방에서 생산되는 최고급의 비단으로, 금(金)으로 등롱(燈籠) 무늬를 넣어 짠 것이다. 송(宋)나라 매요신(梅堯臣)이 저술한 벽운하(碧云騢)에 “문언박이 지성도(知成都)로 있을 때 귀비가 상원(上元)에 사용할 이색의 비단을 짜도록 하였다. 문언박이 공인(工人)으로 하여금 금실로 등롱을 짤 때 연화(蓮花)의 문양을 넣어 중간에 금문(錦紋)을 만들었다. 그 이듬해 상원에 중관(中官)이 시를 짓기를,‘사람이 다시금 등롱금을 안 올리니, 궁중의 여인이 영신을 생각하네.[無人更進燈籠錦, 紅粉宮中憶佞臣.]’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등롱금[燈籠錦] 등롱(燈籠) 무늬 비단은 금(金)으로 등롱 무늬를 짠 최고급 비단이다.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감찰 어사(監察御史)인 당개(唐介)는 당시의 현신(賢臣) 문언박(文彦博)이 인종의 총희(寵姬)인 장 귀인(張貴人)에게 등롱 무늬 비단을 뇌물로 바치고 등용되었다고 탄핵하였는데, 문언박은 실제로 뇌물을 바친 일이 없으면서도 사죄하고 변명하지 않았다. 인종은 그것이 무함인 줄 알았으나 일단 파직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기용하였다. <宋史 唐介列傳>
등롱금[燈籠錦] 등롱금(燈籠錦)은 금실로 등롱(燈籠)의 무늬를 놓는 비단이다. 송(宋)나라 인종(仁宗)의 장 귀비(張貴妃)가 상원연(上元宴) 때 등롱금으로 지은 옷을 입고 참석하자 인종이 이상히 여겨 물어보니 문언박(文彦博)이 바친 것이라고 하므로 인종이 좋지 않게 여겼다. 당개(唐介)가 이것을 듣고 상소하여 문언박을 탄핵하였는데, 실제로 문언박은 등롱금을 장 귀비에게 뇌물로 바친 일이 없었다. 조경(趙絅)이, 당개가 풍문을 듣고 상소하여 문언박을 탄핵한 일을 들어 변명하려고 한 것이다. <宋史 卷313 文彦博傳> <宋名臣言行錄>
등롱금[燈籠錦] 중국 촉(蜀) 지방에서 생산되던 최고급의 비단으로, 금(金)으로 등롱 무늬를 넣어 짰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등롱금은 등롱을 기본 도안으로 여러 가지 무늬들이 질서 있게 분포되어 있는데, 등롱의 초롱 위에는 구슬 장식이 있는 화개(華蓋)가 있고 중심에는 ‘壽’ 자가 새겨져 있으며 등롱의 밑굽은 박쥐 모양이고 위아래에는 벌 무늬가 있다. 박쥐와 벌 무늬는 풍작(豊作), 행복, 장수 등을 상징하니, 중국어에서 박쥐를 뜻하는 ‘박쥐 복(蝠)’은 ‘복 복(福)’과 동음이며 ‘벌 봉(蜂)’은 ‘풍요로울 풍(豊)’과 동음이기 때문이다. 이 도안은 길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으며, 송나라 이후 계속 전해져 왔다.
등롱지역[登壟之役] 타작.
등룡[登龍] 등용(登龍)은 등용문(登龍門)의 준말로, 명망이 높은 사람의 접견을 받아 성가가 높아지는 것을 비유한다. 후한(後漢) 때 이응(李膺)이 홀로 고아한 풍도(風度)를 견지하여 성망(聲望)이 높았으므로, 사대부들이 그의 접견을 받기만 해도 성가가 치솟아 당시 사람들이 ‘용문에 올랐다[登龍門]’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로 명나라 손승은(孫承恩)의 시 음허용석학사원정단술 3수(飲許龍石學士園亭短述三首) 가운데 둘째 수에 “봉황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다투어 기뻐하고, 용문에 오르며 선비들은 거둬주기를 바라누나.[覩鳳人爭快, 登龍士願收.]”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67 李膺列傳> <文簡集 巻17 飲許龍石學士園亭短述三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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