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등루거제[登樓去梯], 등루모거[登樓謀莒], 등루부[登樓賦], 등루장소[登樓長嘯]


등루[登樓]  고대에 제왕이 누각에 올라 사면령을 발하는 의식의 일종으로 사면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송사(宋史) 악지(樂志)에 “오늘 교외에서 천지에 드리는 제사를 마친 뒤에 누각에 올라 사면령을 내리고 궁으로 돌아오셨다.[今郊祀禮畢, 登樓肆赦, 然後還宮.]라고 하였다.

등루[登樓]  누대에 오르다. 한(漢) 나라 말에 위(魏)나라의 왕찬(王粲)이 동탁(董卓)의 난리 때 형주(荊州)에 피난하여 유표(劉表)에게 의지해 있으면서 뜻을 얻지 못함에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서 진퇴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던 고사가 있다. <三國志 魏志 卷二十一 王粲傳>

등루거제[登樓去梯]  처음에는 이롭게 하는 체하다가 뒤에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함. 높은 누상(樓上)에 오르게 하고 오르고 난 후 사다리를 치워버린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기쁘게 하여 주고 그로 인하여 후에 괴로움을 받게 한다는 말이다.

등루모거 이막엄야로지목[登樓謀莒 而莫掩野老之目]  손자수(孫子髓) 용간(用間)에 “심중에 쌓여 있는데 밖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고로, 누대(樓臺)에 올라가 거(莒)나라를 정벌할 것을 도모하나 시골 노인의 눈을 가리지 못하고, 밀실(密室)에서 사면(赦免)을 의논하자 먼저 시장 사람의 귀에 전파된 것이다.[未有蓄於中而不見乎外者. 故登樓謀莒, 而莫掩野老之目. 密室議赦, 而先播市人之耳.]”라고 하였다. 야로(野老)는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은사(隱士)인 동곽우(東郭郵)를 이른다. 제 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과 함께 문을 걸어 잠그고 거(莒)나라를 정벌할 것을 은밀히 의논하였는데, 이 일이 이미 국도(國都)에 소문이 났다. 환공(桓公)이 놀라 당시 사역하던 사람[役人]을 수배한 끝에 동곽우(東郭郵)를 찾아 불러 물으니, 동곽우는 “그날 신이 두 군(君)께서 대(臺) 위에 계신 것을 보았는데, 입을 벌리고 다물지 않으시니, 이는 거(莒)나라 정벌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日者 臣視二君之在臺上也 口開而不闔 是言莒也]”라고 하였다. <管子 권16 小問>

등루부[登樓賦]  한(漢) 나라 말기에 삼국시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위(魏)의 왕찬(王粲)이 객지에서 고향을 그리는 뜻을 주제로 하여 지은 문장이다. 왕찬이 17세 때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지해 있던 중, 당양현(當陽縣) 성루(城樓)에 올라가 지었다 한다. 왕찬(王粲)이 일찍이 동탁(董卓)의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하고 있을 적에 유표에게 그다지 중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고향 생각이 절실해지자,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면서 진퇴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지은 부인데, 그 부에 의하면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고향이 아니거니, 어찌 족히 조금이나마 머무를 수 있으랴.[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라는 등의 고향을 몹시 그리워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전하여 후세에는 문인(文人)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또는 재능을 갖추고도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고사로 흔히 쓰인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文選 卷11>

등루장소[登樓長嘯]  진(晉) 나라 때 유곤(劉琨)이 진양 태수(晉陽太守)로 있을 적에, 호병(胡兵)에게 겹겹으로 포위를 당하자 유곤이 성루에 올라 긴 휘파람을 부니 호병이 이 소리를 듣고는 향수에 젖어있는 틈을 타서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劉琨傳>

등루점자기[登樓占紫氣]  노자(老子)가 서쪽으로 길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에 거의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누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다가, 보라색 기운[紫氣]이 관문 위로 떠오는 것을 살펴보고는, 분명히 진인(眞人)이 올 것이라고 예측을 하였는데, 얼마 뒤에 과연 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列仙傳 上·關令內傳>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