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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도[鄧伯道], 등백빈빙망[登白蘋騁望], 등법유[燈法油], 등보[滕甫], 등보[謄報]


등백도[鄧伯道]  등백도(鄧伯道)는 진(晉)나라 양양(襄陽) 사람 등유(鄧攸)로, 백도(伯道)는 그의 자이다. 건흥(建興) 연간에 하동 태수(河東太守)가 되었는데, 석륵(石勒)의 난리가 있어 처자식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 가는 길에서 적을 만나 형세가 모두를 구원할 수 없었다. 아우는 일찍 죽고 슬하에 독자 밖에 없으므로 자기 아들을 길에 버리고 떠났는데, 아침에 버린 아들이 저녁 무렵에 따라오자, 이튿날 아들을 다시 나무에 묶어 두고 떠났다. 훗날 벼슬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으나, 그 뒤에 아내가 다시 태기(胎氣)가 없어 결국 아들을 얻지 못하자, 그 당시 사람들이 슬피 여기며 “천도(天道)가 무심하여 등백도로 하여금 아들이 없게 하였다.[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라고 하였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이 고사는 소학(小學) 선행(善行)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아들이 따라오자 나무에 묶어 두고 떠났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주희(朱熹)가 유청지(劉淸之)와 함께 소학(小學)을 편집하면서 의도적으로 삭제한 듯하다.

등백도[鄧伯道]  백도는 진(晉)나라 등유(鄧攸)의 자이다. 등유는 서진(西晉) 말기에 후조(後趙)를 건국한 석륵(石勒)에게 사로잡혀 그의 아래에서 참군(參軍)의 벼슬을 하였으나 서진이 멸망하고 강남에 동진(東晉)이 세워지자 남쪽으로 도망을 가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의 벼슬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가 동진으로 도망갈 때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갔는데 도중에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을 만나 둘 다 살릴 수 없게 되자 아들은 버려두고 조카를 살렸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끝내 후사를 얻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두고 “하늘이 무지하여 등백도에게 아이가 없게 했다.[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라고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등백빈빙망[登白蘋騁望]  초사(楚辭) 구가(九歌) 상부인(湘夫人)에 “하얀 수초 위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고, 미인과 만나거든 저녁 일찍 휘장을 치리라.[登白蘋兮騁望, 與佳期兮夕張.]”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굴원의 본뜻은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제수(祭需)를 갖추고 휘장을 친 다음 순(舜) 임금의 후비(后妃)였던 여영(女英)의 신(神)을 맞이하여 흠향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여기 저자 또한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등법유[燈法油]  등에 쓰는 들기름을 이른다.

등보[滕甫]  등보(滕甫)는 송 신종(宋神宗) 때의 직신(直臣)으로, 신종의 신임을 받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그를 모함하는 자들이 그가 반역하는 무리와 몰래 결탁하여 죄인을 고의로 놓아주었다고 하자, 소식(蘇軾)이 그 비방에 대해 변명하는 글을 대신 지어서 해명하였다고 한다.

등보[滕甫]  등보(滕甫)는 등원발(滕元發)로, 보(甫)는 그의 초명(初名)이다. 송 신종(宋神宗) 때 어사 중승(御史中丞), 한림 학사(翰林學士) 등의 벼슬을 지냈다. 신종의 신임을 받았으나, 부당(婦黨) 이봉(李逢)의 역모(逆謀)로 인하여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10여 년 동안을 불우하게 보냈다. 그 이후 여러 말들이 있자 상소를 올려 “악양(樂羊)이 공이 없자 비방하는 글이 상자에 가득하였고, 즉묵대부(卽墨大夫)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헐뜯는 말이 날마다 이르렀습니까.”라고 하며 자신을 변호하자 신종이 호주 자사(湖州刺史)로 삼았다. <宋史 卷332 滕元發列傳>

등보[滕甫]  등보(滕甫)는 자(字)가 원발(元發)인데, 노왕(魯王)의 휘(諱)를 피하여 자(字)를 이름으로 쓰고 다시 자(字)를 달도(達道)라 하였으며, 동양(東陽) 사람이다. 진사과(進士科)로 출사하여 신종(神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지제고(知制誥)와 지간원(知諫院)을 역임하였는데, 처족 이봉(李逢)의 반역에 연좌되어 안주(安州)로 폄적되었다. 등보(滕甫)는 송나라 신종(神宗)에게 매우 신임받던 신하로, 부당(婦黨) 이봉(李逢)의 역모(逆謀)로 인하여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10여 년 동안을 불우하게 보냈는데, 오히려 더 안 좋은 곳에 보내질 것이라거나 혹 다시 후명(後命)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들려오니, 상소를 올려 “악양(樂羊)이 공이 없자 비방하는 글이 상자에 가득하였고, 즉묵대부(卽墨大夫)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헐뜯는 말이 날마다 이르렀습니까?”라고 하며 자신을 변호하였다. <宋史 卷332 滕元發列傳>

등보[謄報]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필사하여 동급 또는 상급의 관사에 보고하는 것, 또는 그러한 문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임금에게 장계를 올리면서 비변사(備邊司)나 해당 도의 감사에게도 등보를 보내 사안을 참고할 수 있게 하였다.

등보륜[鄧輔綸]  자는 미지(彌之), 중국 청나라 때 호남성(湖南省) 무강(武康) 사람이다. 일찍부터 청말의 경학가이며 문학가인 왕개운(王闓運)과 교제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진연(陳衍)은 근대시초(近代詩鈔)에서 그의 시에 대해 “미지의 시는 모두 문선(文選)의 체를 배운 것으로 대부분 옛 풍격과 형식을 모방한 것이다. 상담의 임추 왕개운이 한 때 그와 짝하며 그와 같은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새로울 것이 없었다.[彌之詩全學選體, 多擬古之作, 湘潭王壬秋以爲一時罕有其匹, 盖與之笙磬同音也, 但微覺千篇一律耳.]”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백향정시문집白香亭詩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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