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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벌촉[鄧艾伐蜀], 등애애애[鄧艾艾艾], 등애일봉[鄧艾一鳳], 등애제하론[鄧艾濟河論]


등애규획[鄧艾規劃]  등애(鄧艾)가 군영(軍營)을 미리 규획(規劃)함. 삼국 시대 위(魏)나라 안서장군(安西將軍) 등애(鄧艾)가 장군이 될 큰 뜻을 품고는, 하급 관리로 있을 때부터 고산(高山)과 대택(大澤)을 볼 때마다 군영(軍營)의 처소를 규획하곤 했으므로 사람들이 비웃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결국, 위나라 경원(景元) 4년(263) 등애가 촉을 공격하자 강유(姜維)가 검각(劍閣)에서 굳게 수비하였는데, 등애가 음평(陰平)에서부터 인적이 없는 험난한 골짜기를 지나며 길을 뚫어 부주(涪州)로 나가서 촉의 군사를 격파함으로써 촉의 후주(後主)를 항복시켰다. <三國志 卷28 魏書 鄧艾傳>

등애벌촉[鄧艾伐蜀]  등애(鄧艾)는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명장이다. 경원(景元) 4년, 위(魏)나라의 정서장군(征西將軍) 등애(鄧艾)가 촉한(蜀漢)을 정벌할 적에 음평(陰平)에서 경곡(景穀)의 길을 따라 사람이 없는 지역으로 7백 리를 행군하여 은밀히 강유(江油)에 이르러, 촉한(蜀漢)의 수장(守將) 마막(馬邈)의 항복을 받고 면죽관(綿竹關)에서 촉한(蜀漢)의 위장군(衛將軍) 제갈첨(諸葛瞻)을 격파하니, 촉한(蜀漢)의 후주(後主)인 류선(劉禪)이 항복을 청하였다. <三國志 권28 鄧艾列傳>

등애애애[鄧艾艾艾]  등애(鄧艾)는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장군으로 본래 이름은 등범(鄧範)이고, 자는 사재(士載)이다. 농민 출신으로 말단 관리로 시작했지만, 사마의(司馬懿)에 의해 발탁된 이후에는 촉한(蜀漢)을 정벌하여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평소 말을 더듬으면서 애애(艾艾)라고 몇 번씩 반복하곤 하였는데, 진 문왕(晉文王) 사마소(司馬昭)가 “경은 ‘애애’라고 하니, 정녕 애가 몇이나 되는가?[卿云艾艾, 定是幾艾?]”라고 놀리니, 등애가 “‘봉이여 봉이여’ 반복하지만, 원래 하나의 봉일 뿐입니다.[鳳兮鳳兮, 故是一鳳.]”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등애일봉[鄧艾一鳳]  등애(鄧艾)는 삼국 시대 위(魏)나라 장군으로 촉한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그는 말을 더듬으면서 애애(艾艾)라고 몇 번씩 반복하곤 하였는데, 진 문왕(晉文王) 사마소(司馬昭)가 “경은 애애라고 하니, 애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卿云艾艾 定是幾艾]”라고 놀리니, 등애가 “‘봉이여 봉이여.’라고 반복하지만, 원래 하나의 봉일 뿐입니다.[鳳兮鳳兮 故是一鳳]”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등애제하론[鄧艾濟河論]  등애(鄧艾)가 제하론(濟河論)을 짓고 청하기를 “예전에 황건(黃巾)을 격파한 것을 계기로 둔전(屯田)을 실시하여 허도(許都)에 곡식을 쌓음으로써 사방을 제어하였습니다. 이제 세 방면이 이미 평정되어 싸울 일은 회남(淮南)에 있는데 매번 대군(大軍)이 정벌전을 일으킬 때마다 운용하는 병력 중에 운병(運兵: 군량을 운반하는 군사)이 절반을 넘고 공비(功費: 사업에 소요되는 비용)가 매우 많으며 큰 노역이 됩니다. 진(陳)·채(蔡) 일대는 땅이 낮고 농토는 좋아 허창(許昌) 좌우(주변)의 여러 도전(稻田: 벼를 심는 논)들을 줄인다면 물이 합쳐져 풍부하게 동쪽으로 흘러내려갈 것입니다. 회북(淮北)에 2만 명, 회남(淮南)에 3만 명을 주둔하게 하며 그 중 10분의 2는 휴식하게 한다면 항상 4만명이 있게 되니 이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수비하게 하십시오. 물(水)이 풍부하여(水豐) 항상 서쪽에 비해 3배의 곡식을 거둘 것이니 각종 비용을 헤아려서 제하고도 한 해가 끝날 때면 5백만 곡(斛)을 군자(軍資: 군대에서 쓰이는 물자)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6~7년 동안 하면 회수 가에(淮上) 3천만 곡(斛)을 비축할 수 있는데 이는 곧 10만 군대의 5년 양식입니다. 이로써 오(吳)를 노린다면(乘) 어디를 가든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昔破黃巾, 因爲屯田, 積穀于許都以制四方. 今三隅已定, 事在淮南, 每大軍征擧, 運兵過半, 功費巨億, 以爲大役. 陳蔡之間, 土下田良, 可省許昌左右諸稻田, 幷水東下. 令淮北屯二萬人, 淮南三萬人, 十二分休, 常有四萬人, 且田且守. 水豐常收三倍於西, 計除衆費, 歲完五百萬斛以爲軍資. 六七年間, 可積三千萬斛於淮上, 此則十萬之衆五年食也. 以此乘吳, 無往而不克矣.]”라고 하였다. <三國志 卷28 魏書 鄧艾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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