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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종회[鄧艾鍾會], 등애화영[鄧艾畫營], 등양[騰揚], 등양뇌락[騰驤磊落]


등애종회[鄧艾鍾會]  종회(鍾會)의 자는 사계(士季)로 위나라 영천(潁川) 장사(長社) 사람이다. 진서장군(鎭西將軍)이 되어 등애(鄧艾)와 함께 촉한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등애가 반란을 꾀한다고 모함하여 죽인 후에 홀로 대군을 이끌고 모반을 꾀하다가 반란군에게 피살되었다. 등애(鄧艾)는 자가 사재(士載)로 삼국 시대 위나라 극양(棘陽) 사람이다.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군대를 크게 일으켜 촉한을 공격하면서 음평(陰平)으로부터 진군하여 험준한 곳을 만나면 자신은 담요를 두르고 비탈을 굴러 내려가고, 병사들은 꿰미의 물고기처럼 줄지어 험지를 통과하여 진군하였고, 산을 통과한 뒤에 강유(江油)를 경유하여 성도(成都)를 불시에 침공하였다. 촉한의 유선은 갑자기 위나라 병사가 들이닥치자 변변히 대항하지도 못하고 옥새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등애는 나중에 패역(悖逆)하고 변란을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종회의 모함을 받아 피살당했다. <三國志 卷28 魏書 鄧艾鍾㑹傳>

등애지눌[鄧艾之訥]  등애는 삼국 시대 위(魏)나라 장군으로 촉한(蜀漢)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그는 말을 더듬으면서 애애(艾艾)라고 몇 번씩 반복하곤 하였는데, 진 문왕(晉文王) 사마소(司馬昭)가 “경은 애애라고 하니, 애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卿云艾艾 定是幾艾]”라고 놀리니, 등애가 “‘봉이여 봉이여.’라고 반복하지만, 원래 하나의 봉일 뿐입니다.[鳳兮鳳兮 故是一鳳]”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등애치둔전[鄧艾置屯田]  등애(鄧艾)는 위(魏)나라 장수로 별명이 등흘(鄧吃)이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16에 “등애의 사당이 백수피(白水陂)의 위에 있다. 등애가 이곳에다 둔전(屯田) 49군데를 설치하였는데, 동서의 길이가 35리였다.[鄧艾廟在白水陂上, 去縣南一百二十裏. 艾於此置屯田四十九所. 其陂東西長三十五裏, 去縣百裏.]”라고 하였다.

등애화영[鄧艾畫營]  등애(鄧艾)가 군영(軍營)을 미리 규획(規劃)함. 삼국 시대 위(魏)나라 안서장군(安西將軍) 등애가 장군이 될 큰 뜻을 품고는, 하급 관리로 있을 때부터 고산(高山)과 대택(大澤)을 볼 때마다 군영(軍營)의 처소를 규획하곤 했으므로 사람들이 비웃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28 魏書 鄧艾傳>

등약수[鄧若水]  중국 남송(南宋)의 문신으로, 자는 평중(平仲)이다. 경학과 역사에 통달하였고 문장에 기개가 있었다. 금(金)나라 정벌에서 오희(吳曦)가 송나라를 배반하자 그를 죽이려고 찾아가다가 도중에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의 뜻이 큰 것을 비웃는 한편 장하게 여겼다. 1220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당시 사미원(史彌遠)이 국정을 농단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파면시킬 것을 청하였고 후에 사미원의 시체를 꺼내어 목을 벨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영국부 통판(甯國府通判)으로 폄출되었고,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고 태호(太湖)의 동정산(洞庭山)에 들어가 은거하며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등양[鄧颺]  삼국시대 위(魏)나라 남양(南陽) 사람으로, 영천태수(穎川太守)와 시중상서(侍中尙書)를 지냈다. 조상(曹爽)·하안(何晏) 등과 함께 사마의(司馬懿)에게 살해되었다.

등양[騰揚]  세력이나 지위가 높아서 드날림. 세력이나 지위가 높아지고 이름이 드날림.

등양뇌락[騰驤磊落]  등양(騰驤)은 뛰어오르고 내달린다는 뜻이다. 말이 내달리고 뛰어오르는 그 모습이 대단함을 말한 것이다.두보(杜甫)의 시 위풍록사댁관조장군화마도인(韋諷錄事宅觀曹將軍畵馬圖引)에 “저 옛날 순행(巡幸)하여 신풍궁(新豊宮)에 행차할 적에, 비취 깃발 하늘에 펄럭이며 동쪽 향해 왔었네. 그때 뛰어오르며 우뚝히 솟았던 삼만 필, 모두 이 그림에 있는 말과 근골(筋骨)이 같다오.[憶昔巡幸新豐宮, 翠華拂天來向東. 騰驤磊落三萬匹, 皆與此圖筋骨同.]”라고 한 데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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