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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왕각[滕王閣], 등왕각기[滕王閣記], 등왕각도[滕王閣圖], 등왕각삼왕[滕王閣三王]


등오정[登鼇頂]  동해에 자라[鼇]가 산을 이고 있는데, 그 위에 신선이 산다 한다.

등옥[登屋]  옥상에 오름.

등완백[鄧頑伯]  청(淸) 회령인(淮寧人)으로 초명(初名)은 염(琰), 자는 석여(石如)인데 인종(仁宗)의 휘(諱)를 피하여 자를 이름으로 하고 다시 자를 완백이라 하였으며, 완공산(皖公山) 아래에 살아서 또 완백산인(完白山人)이라 호하였다. 사체(四體)의 서(書)에 공(工)하되 전서(篆書)는 더욱 신품(神品)이라 칭한다. 포세신(包世臣)은 예주쌍집(藝舟雙楫)을 저술하여 청대 제일로 추앙하였다.

등왕각[滕王閣]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의 아들 이원영(李元嬰)이 홍주 자사(洪州刺史)로 있을 때 세운 누각이다. 나중에 이원영이 등왕(滕王)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 누각을 등왕각이라 이름 하였다. 그 옛터가 지금의 강서성 신건현(新建縣) 서쪽 장강(章江) 입구 위에 있는데, 아래로 공강(灨江)에 임하였다. 고종(高宗) 연간에 홍주목사(洪州牧使) 염백서(閻伯嶼)가 이 누각을 중수한 기념으로 9월 9일 중양일에 여기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초당사걸(初唐四傑) 가운데 한 사람인 왕발(王勃)이 참석하여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어 더욱 유명해졌다.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지는 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긴 하늘과 함께 한 빛일세.[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고 한 구절은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오늘날까지 일컬어진다.

등왕각기[滕王閣記]  등왕각(滕王閣)은 당 고조(唐高祖)의 아들인 이원영(李元嬰)이 홍주 자사(洪州刺史)로 있을 때 창건한 것으로, 왕발(王勃)이 쓴 등왕각서(滕王閣序)가 유명하다. 당나라 원화 15년(820)에 어사중승(御史中丞) 왕중서(王仲舒)가 등왕각(滕王閣)을 중수하고 당대의 문장가 한유(韓愈)를 불러서 기문을 짓게 했는데, 이때 지은 글이 신수등왕각기(新修滕王閣記)이다. 신수등왕각기의 대략에 “한유가 젊었을 때, 강남에 화려하고 구경할 만한 많은 누각들 중에서 등왕각이 제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등왕각에 대해 삼왕이 지은 서(序), 부(賦), 기(記) 등을 읽어 보니 그들의 글솜씨가 훌륭한지라, 더욱 한번 가서 보고 싶었다. 벼슬살이로 조정에 매인 몸이라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다가 뒤에 강서 관찰사(江西觀察使) 왕중서가 등왕각을 새로 중수하고 한유에게 그 기문을 짓게 하자, 한유가 이름이 등왕각 위에 기재되고 글이 삼왕(三王)의 다음에 놓이게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마침내 기문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명나라 모곤(茅坤)은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에서 “전편에 걸쳐 등왕각의 구체적인 사정은 언급하지 않고 다만 평생의 감개를 서술하여 문장에 질탕한 기복을 일으켰는데, 완곡하면서도 대범하다.[通篇不及滕王閣中情事, 而止以生平感慨作波瀾, 婉而宕.]”라고 평하였다.

등왕각도[滕王閣圖]  등왕각(滕王閣)은 당고조(唐高祖)의 아들 등왕(滕王) 원영(元嬰)이 처음 지은 누각이다. 당나라 문인 왕발(王㪍)이 교지령(交趾令)으로 있는 아버지 복치(福畤)를 보러 가는 길에, 꿈에 강신(江神)이 와서 말하기를 “내일 9월 9일에 남창(南昌)의 등왕각(滕王閣)을 중수(重修)한 낙성식(落成式)이 있으니 참석하여 글을 지어 이름을 내라.”고 하였다. 왕발이 대답하기를 “여기서 남창까지 7백 리인데 하룻밤 사이에 당도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니, 강신(江神)이 “배에 오르기만 하면 내가 바람을 빌려 주리라.”라고 하였다. 왕발은 과연 하룻밤 사이에 남창에 도착하니 홍주 자사(洪州刺史)가 등왕각에 낙성식을 크게 열고 여러 손들에게 필묵(筆墨)과 종이를 돌려 글을 짓게 하였다. 사실은 자사(刺史)가 자기의 사위를 시켜 미리 글을 지어 두고 여러 손들이 사양하기를 기다려 사위의 글을 자랑하려 하였던 것이다. 다른 손은 모두 사양하는데 왕발이 사양하지 않고 붓을 드니 자사는 불쾌하여 사람을 시켜 왕발의 글을 쓰는 대로 엿보고 와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중간에 가서 “떨어진 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는 구절을 쓰니, 자사가 듣고 “참으로 기이한 재주로다.”라고 하였다. 왕발은 끝에 다시 시(詩)를 쓰기를 “그림 그린 기둥은 아침에 남포의 구름에 날고 주렴은 저녁에 서산 비에 걷는다.[畵棟朝飛南浦雲, 珠簾暮捲西山雨.]”라고 하였다.

등왕각삼왕[滕王閣三王]  등왕각(滕王閣)의 삼왕(三王). 삼왕은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은 왕발(王勃), 등왕각부(滕王閣賦)를 지은 왕서(王緖), 중수등왕각기(重修滕王閣記)를 지은 왕중서(王仲舒)를 말한다. 한유(韓愈)의 신수등왕각기(新修滕王閣記)에 그 내용이 나온다. 당나라 원화 15년(820)에 어사 중승(御史中丞) 왕중서(王仲舒)가 등왕각을 중수하고 당대의 문장가 한유(韓愈)를 불러서 기문을 짓게 했는데, 이때 지은 글이 신수등왕각기(新修滕王閣記)이다. 신수등왕각기의 대략에 “한유가 젊었을 때, 강남에 화려하고 구경할 만한 많은 누각들 중에서 등왕각이 제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등왕각에 대해 삼왕(三王)이 지은 서(序), 부(賦), 기(記) 등을 읽어 보니 그들의 글솜씨가 훌륭한지라, 더욱 한번 가서 보고 싶었다. 벼슬살이로 조정에 매인 몸이라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다가 뒤에 강서 관찰사(江西觀察使) 왕중서가 등왕각을 새로 중수하고 한유에게 그 기문을 짓게 하자, 한유가 이름이 등왕각 위에 기재되고 글이 삼왕의 다음에 놓이게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마침내 기문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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