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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유계아[鄧攸繫兒], 등유목[燈油木], 등유무아[鄧攸無兒], 등유무자[鄧攸無子]


등유[鄧攸]  등유(鄧攸)는 진(晉) 나라 사람으로 조카와 자기 자식을 데리고 피난을 가다가 둘 다 데리고 갈 수 없자 자신의 아들을 나무에 묶어 놓고 갔다. 뒤에 자식이 없었는데 소학(小學)에서는 “하늘이 무지(無知)하여 등유가 자식이 없었다.”고 하였으나 후인들이 등유의 행동이 잔인하였음을 비판하면서 “하늘이 유지(有知)하여 자식이 없었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주자는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학(小學)의 이 내용을 언급하면서 소학(小學)에서 삭제하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小學諸家集註增解 卷6 善行6>

등유[鄧攸]  등유는 진(晉) 나라 양릉(襄陵)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道)이다. 서진(西晉) 말 영가(永嘉 진 회제(晉懷帝)의 연호)의 난리 때, 자기의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을 가다가 적을 만나자 자기 아들을 버리고 조카만 데리고 도망쳤다. 뒤에 동진(東晉)에서 벼슬하여 청렴하기로 이름이 났으나 끝내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천도(天道)가 무지(無知)하여 등백도(鄧伯道)에게 자식이 없게 한다.’고 탄식하였다. <晉書 卷90> 주희는 이 일에 대해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식을 나무에 매어놓고 간 일은 너무 심한 일인 듯하니, 이런 일은 마땅히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그 일을 다 제거할 생각이 없다면, 자식을 버린 앞의 이야기만 제거해도 좋겠다.”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35 與劉子澄書>

등유[鄧攸]  진(晉)나라 회제(懷帝)·원제(元帝)·성제(成帝) 때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道)이다. 벼슬은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오군 태수(吳郡太守)를 지냈는데, 청렴하여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 뒤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등유가 하동 태수(河東太守)로 있었을 때 석륵(石勒)의 난리를 만나 어린 아들과 죽은 아우의 소생인 조카를 데리고 피란을 갔는데, 도중에 자주 도적을 만나자 두 아이를 모두 보전할 수 없다고 여기고, 아우는 일찍 죽고 독자 밖에 없으므로, 자기 아들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나무에 묶어 놓고 조카만 데리고 도망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가 다시 태기가 없어 결국 아들이 없게 되니, 당시 사람들이 등유를 의롭게 여겨 “천도(天道)가 앎이 없어 백도(伯道)로 하여금 아이가 없게 하였다.[天道無知, 使伯道無兒.]”라고 하였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등유계아[鄧攸繫兒]  등유(鄧攸)는 자가 백도(伯道)이며, 진(晉)나라 때 하동태수(河東太守)를 지냈는데, 청렴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영가(永嘉) 말엽에 석륵(石勒)에게 가산을 몰수당하고 도망을 갈 때 도적을 만나 또 소와 말을 모두 잃었다. 온 가족이 걸어서 도망을 치는데, 등유는 자신의 아들과 아우의 아들을 함께 업고 도망을 치다가 도저히 둘 다 살릴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아우의 아들은 하나이므로 후사를 끊을 수 없고, 우리는 뒤에 다시 아들을 낳으면 된다.’라고 하고 새벽에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갔다. 그런데 다음날 저녁이 되어 아들이 따라오자, 이튿날 아침에 자기 아들을 나무에 묶어 놓고, 조카만 보호하여 데려갔는데, 그 자신은 끝내 후사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슬퍼하기를 “하늘의 도가 무지하여 등백도에게 자식이 없게 만들었네.[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라고 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이 고사가 소학(小學) 선행(善行) 제35장에 실려 있으나 아들을 나무에 묶어 둔 대목은 산삭되어 있다.

등유등수[鄧攸鄧綏]  등수(鄧綏)는 진(晉)나라 때 우복야(右僕射)를 지낸 등유(鄧攸)의 조카이다. 영가(永嘉) 말년에 등유가 석륵(石勒)의 난을 피해 도망가다가 도적을 만나 소와 말을 빼앗기고 그의 아들과 죽은 아우의 아들인 등수를 등에 업고 걸어서 도망하였으나 두 아이를 모두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고 판단되자, 죽은 아우의 후사를 끊을 수 없다고 여겨 마침내 자신의 자식을 버리고 떠났는데, 끝내 그에게 후사가 없었다. 이에 등수가 등유를 위해 삼년복을 입었다. <晉書 卷90 鄧攸列傳>

등유목[燈油木]  쉬나무. 등유목(燈油木)이라 하여 열매를 따서 등잔불을 밝히는 기름으로 만들어 썼다.

등유무아[鄧攸無兒]  아들이 죽어 후사가 없는 것을 말한다. 등유(鄧攸)는 진(晉) 나라 양릉(襄陵)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道)이다. 서진(西晉) 말 영가(永嘉: 진 회제(晉懷帝)의 연호)의 난리 때, 자기의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을 가다가 적을 만나자 자기 아들을 버리고 조카만 데리고 도망쳤다. 뒤에 동진(東晉)에서 벼슬하여 청렴하기로 이름이 났으나 끝내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천도(天道)가 무지(無知)하여 등백도(鄧伯道)에게 자식이 없게 한다.’고 탄식하였다. <晉書 卷90> 주희는 이 일에 대해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식을 나무에 매어놓고 간 일은 너무 심한 일인 듯하니, 이런 일은 마땅히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그 일을 다 제거할 생각이 없다면, 자식을 버린 앞의 이야기만 제거해도 좋겠다.”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35 與劉子澄書>

등유무자[鄧攸無子]  죽은 형의 후사를 위하여 자신의 자식을 희생시킨 등유(鄧攸)의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진서(晉書) 등유전(鄧攸傳)에 보인다. 등유가 영가(永嘉) 말년에 석륵(石勒)의 난을 만나 말과 소에 처자를 태우고 도피하던 중 도적을 만나 말과 소를 빼앗겨 자신의 아들과 동생의 아들을 모두 데려갈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등유가 “나의 동생이 일찍 죽어 오직 자식 하나밖에 없는데 대를 끊게 할 수 없으니 우리의 아이를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부인을 설득하여 자신의 아이를 버리고 떠났는데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자,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겨 그를 두고 말하기를 “천도(天道)는 아는 게 없는지, 등백도(鄧伯道)로 하여금 아이가 없게 하였다.[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라고 하였다. 백도(伯道)는 등유의 자(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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