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조[登朝] 조정에 등용되다. 송사(宋史) 유희고전(柳熙古傳)에 “열여덟 개 관직을 역임하면서 조정에 몸담은 삼십여 년 동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歷官十八, 登朝三十餘年, 未嘗有過.]”라고 하였다. 수도(數度)는 여러 차례를 가리킨다.
등조[騰槽] 한유(韓愈)의 평회서비(平淮西碑)에 군량과 꼴이 충분함을 일러 “군사들은 배불리 먹고 노래하며, 말들은 말구유에서 뛰논다.[士飽而歌, 馬騰於槽.]”라고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3>
등조고금우[登眺古今憂] 등조(登眺)는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는 것을 이른다. 예나 지금이나 높은 곳에 올라 고향 생각으로 시름에 잠기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삼국 시대 왕찬(王粲)이 형주(荊州)의 성루(城樓) 위에 올라가 울적한 마음으로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등루부(登樓賦)에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잠시인들 머물 수 있으리오.[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라고 하고 “이 누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며, 애오라지 한가한 날 시름을 달랜다.[登玆樓以四望, 聊暇日以銷憂.]”라고 하였다.
등조무수[燈照無睡] 두보(杜甫)의 시 대운사찬공방(大雲寺贊公房) 기3(其三)에 “등잔불 환히 비춰 잠 못 드는데, 마음 맑으니 묘향이 풍김을 느끼네. 깊은 밤 전각이 우뚝 솟고, 바람이 금빛 풍경을 흔드네.[燈影照無睡, 心淸聞妙香. 夜深殿突兀, 風動金琅璫.]”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4>
등조지리[登朝之吏]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등종량[滕宗諒] 자는 자경(子京)이며, 하남(河南) 낙양(洛阳) 사람이다. 송나라의 문신으로 천장각 대제(天章閣待制)·정언(正言)·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고, 범중엄(范仲淹)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였다. 경력(慶曆) 2년(1042) 원호(元昊)가 다시 침입하여 정주(定州)에서 전투가 벌어져 송(宋)나라 군사가 대패하였다. 등종량이 당시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지경주(知涇州)로 있으면서 수천 명의 농민을 모아서 성을 지켰다. 이때 범중엄이 경주(慶州)로부터 와서 구원하러 오니, 등종량은 소를 잡고 술자리를 마련해 군사들을 호궤(犒饋)하고 전몰한 군사들의 처자식을 위로하니, 변방의 백성들이 다소 안정되었다. 이에 범중엄이 등종량을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경주로 돌아갔다. 그 후 어사(御史)가 등종량이 경주에서 호궤한 것을 가지고 백성들을 침탈했다고 탄핵하니, 등종량이 죄가 다른 사람에게 미칠까 두려워 당시의 문서를 불태웠다. 등종량은 이 일로 벼슬이 강등되어 지괵주(知虢州)가 되었고 다시 지악주(知岳州)로 옮겨갔다. 당시 두연(杜衍)이 추밀원(樞密院)에 있으면서 등종량에게 심하게 죄를 주고자 했는데 범중엄은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있으면서 힘써 등종량을 위해 변호하였다.
등좌지강[登座之講] 강좌(講座)에 올라서 한 강서. 송(宋)나라 때 사거렴(謝擧廉)이 박학하고 사장에 뛰어나 종유하는 자가 수백 명이었는데, 그가 집에 강석(講席)을 설치하고 매일 강좌(講座)에 올라 글 한 통씩을 강하면서도 조금도 피곤해하지 않았으며, 늘 제철 과일을 마련해 주어 강의가 끝나면 제생들이 차를 마치고 과일을 먹고서야 물러갔다고 한다. <獨醒雜志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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